[문화정책/이슈] 국경 너머의 문화유산, 헝가리는 어떻게 지키는가
2025-09-10주요내용
한 국가의 문화유산은 반드시 그 나라의 현재 국경 안에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헝가리 역시 과거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시절 광대한 영토를 가졌던 역사 때문에 현재는 루마니아, 슬로바키아 등 이웃 국가의 영토가 된 지역에 수많은 중요 문화유산을 남겨두고 있다. 소설『드라큘라』의 배경으로도 유명한 루마니아 트란실바니아 지역이 바로 그 대표적인 예다. 이곳은 제1차 세계대전 이전까지 수백 년간 헝가리 왕국의 영토였기에 지금도 수많은 헝가리 귀족의 성과 교회가 유산으로 남아 있다. 최근 이 트란실바니아의 바피 성(Bánffy Castle)에 타마쉬 술록(Tamás Sulyok) 헝가리 대통령이 직접 방문하며 헝가리가 국경 너머의 문화유산을 어떠한 철학과 방식으로 지켜내고 있는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주었다. 폐허에서 살아있는 유산으로 루마니아 본치다(Bonchida)에 위치한 16세기 건축물 바피 성은 한때 '트란실바니아의 베르사유'라 불릴 만큼 화려했다. 하지만 제2차 세계대전 중 후퇴하던 독일군에 의해 불타면서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이후 루마니아 공산 정권 하에서 성이 방치되며 완전히 폐허가 됐다.

< 전쟁과 방치로 폐허가 된 바피 성 복원의 역사 - 출처: 트란실바니아 트러스트 재단 홈페이지 >
이 잊혔던 유산이 다시 숨을 쉬기 시작한 것은 건축가, 미술사학자, 구조 공학자 등 문화유산 보존 전문가들로 구성된 트란실바니아 트러스트(Transylvanian Trust) 재단이 2001년부터 복원을 주도하면서부터였다. 1996년 설립된 트란실바니아 트러스트 재단은 비정부기구(NGO)로 루마니아 내 건축 유산, 특히 역사적으로 소외됐던 트란실바니아 지역의 유산을 체계적으로 복원하고 교육하는 것을 목표로 활동하는 전문 단체다. 헝가리 정부가 '국경 너머 헝가리 문화유산 보존'이라는 명확한 정책 목표 아래 트란실바니아 트러스트 재단에 자금을 지원했고 여기에 유럽연합(EU) 기금과 민간의 협력이 더해졌다. 재단 대표인 칠러 헤게뒤시(Csilla Hegedűs)에 따르면 지금까지 복원에 약 5백만 유로(약 81억 1,000만 원)가 투입됐으며 완전한 복원을 위해서는 8백만 유로(약 129억 7,600만 원)가 더 필요한 진행 중인 프로젝트다. 보존의 철학, 미래를 위한 교육 바피 성 복원은 단순히 과거의 모습을 재현하는 데 그치지 않았다. 복원 프로젝트의 핵심은 이곳을 지속가능한 살아있는 문화유산으로 만드는 것이었다. 술록 대통령은 방문 중 "단순히 무언가를 복원하는 것을 넘어 그것이 제대로 기능하게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는데 이는 바피 성 복원 철학을 정확히 보여주는 대목이다.

< 바피 성 내부에 설립된 '건축유산복원 교육 센터'에서 현장 교육을 받고 있는 참가자들 - 출처: 트란실바니아 트러스트 재단 홈페이지 >
그 대표적인 예가 성 내부에 설립된 '건축유산 복원 교육센터'다. 이곳의 교육은 책상과 의자가 놓인 평범한 강의실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었다. 복원 현장 자체가 곧 살아있는 교실이자 실습 현장이 되는 방식이다. 매년 여름 유럽 전역에서 모인 참가자들은 마스터 장인들의 지도 아래 석조, 목공, 미장 등 전통 건축 기술을 이론으로 배운 뒤 옆에 있는 실제 성벽과 건물에 그 기술을 적용하며 복원 작업에 직접 참여한다. 2001년부터 시작된 이 독특한 현장 교육을 통해 지금까지 3,000명이 넘는 전문가들이 이곳을 거쳐 갔다. 이를 통해 바피 성은 과거의 유산을 보존하는 것을 넘어 그 보존의 기술과 철학 자체를 미래 세대에게 전수하는 지속가능한 교육의 장으로 거듭났다. 루마니아 영토 안에 있지만 헝가리의 역사와 문화를 배우고 체험하는 핵심적인 거점 역할을 하게 된 것이다. 헝가리의 이러한 정책은 한국의 상황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한국 역시 일본, 중국, 미국 등 전 세계에 흩어져 있는 수많은 국외소재문화재를 보유하고 있으며 국외소재문화재재단을 중심으로 환수 및 보존 지원 활동을 펼치고 있다. 하지만 헝가리의 바피 성 사례는 '환수'만이 유일한 해답이 아님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현지 국가와의 협력을 통해 문화유산을 '살아있는 교육 및 문화 공간'으로 적극 활용하는 헝가리의 방식은 해당 문화유산이 현지 사회에 기여하고 사랑받게 함으로써 더욱 지속가능한 보존이 가능함을 증명하기 때문이다. 이는 약탈 문화재의 환수와는 또 다른 차원의 접근이다. 한국 역시 상하이 대한민국 임시정부 청사 보존과 같이 현지 활용에 성공한 사례가 있지만 대부분의 해외 소재 문화재는 여전히 수장고에 잠들어 있는 경우가 많다. 국경 너머의 우리 문화유산을 어떻게 현지인들과 함께 호흡하는 살아있는 유산으로 만들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 필요한 시점이다. 바피 성 복원 프로젝트는 헝가리 정부의 명확한 정책적 비전, 국제기금의 활용, 그리고 살아있는 유산으로 만들려는 민간 재단의 창의적인 노력이 결합된 결과물이다. 이는 국경 너머의 문화유산이 더 이상 과거의 영광이나 상실의 상징이 아니라 미래 세대를 위한 교육의 장이자 국가 간 문화교류의 가교가 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훌륭한 사례로 평가받는다.
사진출처 및 참고자료 - 《Daily News Hungary》 (2025. 8. 18). “Transylvanian Versailles” castle under ongoing reconstruction, Hungary’s President visits – PHOTOS, https://dailynewshungary.com/hungarian-castle-renovation-transylvania/ - 바피 성 홈페이지, https://banffycastle.ro/ - 트란실바니아 트러스트 재단 홈페이지, https://www.transylvaniatrust.ro/en/
통신원 정보
성명 : 유희정[한국국제문화교류진흥원 헝가리/부다페스트 통신원] 약력 : 『한국 영화 속 주변부 여성과 미시 권력』 저자
- 해당장르 :
- 일반
- 해당국가 :
- Hunga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