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

[문화정책/이슈] 터키의 외환위기와 민족주의 카드

2018-08-23 한국국제문화교류진흥원

주요내용

지난 일주일 동안 한국 포털 사이트 10위권 내 터키가 올랐다. 일촉즉발 위기에 놓인 터키의 경제 상황 때문이다. 통신원이 터키에서 유학을 시작했을 때만 해도 1TL(터키리라)290원 선이었는데, 지난주에는 무려 190원까지 떨어졌다. 상황을 심각하게 인지하지 못하는 터키인들과는 달리, 외국인 투자자들은 이때를 노려 재빨리 외화를 터키리라로 바꾸어 고금리 저축성 예금에 예치하거나, 주식을 사들였다. 한국에서는 일반인들조차 고가의 명품들을 저렴한 가격에 사 되팔려는 목적으로 구매대행자를 찾기에 바빴다. ‘터키 버버리 가격이 실시간 검색어에 하루종일 올라와 있었으니, 지난 며칠 동안 터키 경제가 얼마나 무방비 상태에 놓였는지 짐작할 수 있다. 조용했던 터키한인회 홈페이지에도 갑자기 신규 게시물 숫자가 폭발적으로 늘어났는데, 이 또한 명품 구매대행자를 찾는다는 글이었다. 결국 부끄러움은 매일 터키인들과 얼굴을 맞대며 살아가는 이곳의 교민들의 몫이었다.

 

터키리라의 가치가 하락한 것은 비단 지난주에 국한된 이야기는 아니다. 이미 지난 2년간 터키리라는 꾸준히 내리막을 걷고 있었다. 하지만 왜 갑자기 금융위기설까지 돌며 환율이 바닥까지 찍게 된 것일까? 표면적으로만 보면 이렇다. 미국에게 터키는 지정학적으로 중요한 국가이기에 오랫동안 가장 가까운 군사 동맹국의 지위를 유지해왔고, 두 국가 사이에는 여태껏 불화가 존재하지 않았다. 그런데 현재 지난 2016년에 있었던 쿠데타 시도에 가담한 것으로 지목되는 미국인 앤드류 브런슨 목사가 35년형을 받고 가택연금 중인 데다, 이에 대한 미국의 석방요구를 터키 대통령이 거부하면서 불화가 싹텄다. 터키 정부가 요구하는 것은 앤드류 목사의 석방을 원한다면 쿠데타 계획의 최정점에 있다고 추정되는 페툴라 귈렌을 먼저 터키로 송환하는데 협조해달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인권과 자유의 수호를 앞세우는 미국으로서는 받아들이기 어려웠을 것이다.

 


<트럼프와 에르도안 대통령은 불과 한 달 전만해도 NATO 가입국 정상 회담에서 만나 웃으며 악수를 나눴다 - 출처 : Hurriyet Daily News>

 

한편, 한국 국립외교원 인남식 교수는 이 사태가 단순한 두 국가 수장 간의 자존심 싸움이 아니라 미국과 터키의 국내정치에서 기인하는 전략적 충돌이라 분석하였다. 먼저 터키 쪽 상황을 보면, 현 대통령이 장기집권을 위해 총력을 기울이고 있는 상황에서 페툴라 귈렌이라는 인물은 큰 위협이기 때문에 어떤 식으로든 조치를 해야 할 것이고, 트럼프의 입장에서는 중간 선거를 앞두고 미국 내 복음주의 세력의 지지를 얻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 목사 신분의 앤드류 브런슨이라는 인물이 미국 정치 세계에서 갖는 상징적인 힘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터키에서 이러한 상황을 지켜보고만 있을 수는 없다. 경제위기는 정권이 신뢰를 잃게 되는 가장 명확한 이유가 되기 때문이다. 현재 터키 대통령이 꺼내놓은 카드는 두 가지다. 카타르와 러시아, 독일 등을 비롯한 주변 우호국들로부터 긴급 자금을 지원받는 것과 민족주의를 통한 국민의 단결인데, 통신원의 눈길을 끈 것은 바로 이 두 번째 카드이다. 터키리라 가치가 바닥을 찍은 다음 날, 에르도안 대통령은 SETA(정치, 경제, 사회 연구 재단)의 창립기념일 행사에 참석하여 아래와 같이 발언했다.


터키의 경제인들에게 고한다경제가 흔들릴 때가장 현명한 대응은 우리끼리 단합하는 것이고더 많이 생산하는 것이고더 많이 수출하는 것이다오늘부로 터키는 미국산 가전제품에 대한 보이콧을 선언한다그들에게 아이폰이 있다면반대편에는 삼성이 있다터키에서 생산하는 베스텔사의 비너스도 있다기다려보자는 식으로 우리가 생산을 멈춘다면위기상황이라며 상거래를 멈춘다면, ‘멀리보자며 투자를 연기한다면무엇보다 위험부담이 있다며 가지고 있는 돈을 가지고 환전소로 향한다면확신하건데 우리 자신을 스스로 내어주는 꼴이 될 것이다우리 손에 터키리라 대신 달러를 더 많이 쥐고 있는 것은 우리가 직면한 상황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침전하는 것이다당신은 터키인이다따라서 터키리라와 함께해야 한다고국의 경제를 포기하는 것은 고국을 버리는 것과 다를 바 없다또한 해외에 살며 고국이 암흑으로 변해가는 것을 그냥 보고만 있는 터키인이 있다면우리는 그들을 ‘mankurt(백치 상태의 노예)’라 부를 것이다터키에 그런 국민 따위는 필요 없다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신앙심으로 가득 차고근면하며교육이든 스포츠이든 자기 분야에서 최선을 다하는 젊은이들이다.

 

에르도안 대통령이 본 발언에 터키인들은 매우 적극적인 액션으로 화답했다. 곧장 가전제품뿐만 아니라 음료수에 이르기까지 모든 미국산에 대한 불매운동이 시작되었고, ‘미국은 세계의 적이라는 말이 빠르게 퍼져나갔다. 도시 곳곳에서는 자영업자들이 무료 식사권, 이발권 등을 제공하며 시민들에게 외화를 팔아 외환위기 극복에 이바지할 것을 적극적으로 장려하고 있다. 더욱 극단적인 형태로는 아이폰을 노골적으로 망가뜨리는 영상들이 제작, 유통되면서 민족주의를 뛰어넘은 국수주의로 발전하는 양상을 보이는 중이다. 외국인들은 이러한 현상 속에서 다시 한번 강력한 터키의 민족주의를 실감하는 한편, 그러한 민족주의를 바탕으로 어제의 동무가 오늘의 적이 되는 극적인 상황을 목격하는 중이다. 이는 터키와 미국 간의 특수한 상황이라 할 수 없다. 최근만 봐도 터키인들은 크고 작은 이슈들로 인해 우호국이었던 독일, 오스트리아, 러시아 등과 등을 돌리고, 비난했었다.

 


<달러를 환전한 시민들에게 자신들의 서비스와 상품을 무료로 제공하거나 외화 결제를 거부하는 자영업자들 

출처 : 왼쪽부터 순서대로 Hurriyet, Aksam, Manisahaberleri>

 


<미국에 대한 보이콧으로 일부러 아이폰을 망가뜨리고 있는 터키 시민들 출처 : Middle East Eye 유투브 채널>

 

한국과 터키도 미국만큼이나 가까운 우호국의 관계를 유지해오고 있지만, 한국인들에게 서슴없이 형제의 나라에서 왔군요라며 환영하는 터키인들의 태도가 늘 한결같을 것이라는 보장은 없다. 특히 이번 사태를 보며 이 나라의 한류에 대한 열기가 순식간에 식어버리는 것 또한 불가능한 것은 아닐 것이라는 우려도 생긴다. 예를 들어, 통신원이 기고한 바 있지만 몇 달 전 터키 정부의 대 테러범 소탕 작전에 대해 한국언론이 쿠르드인에 대한 탄압이라 해석한 것을 두고 터키 네티즌들은 굉장히 불쾌해했으며, 한국은 더이상 형제가 아니라는 발언도 자주 목격되었다. 한류와 같은 소프트 파워가 정치적 이해관계를 뛰어넘는 영향력을 가지고 있음은 분명하다. 하지만 한류조차도 정치적 쟁점이 될 수 있는 이슈나 터키와 관련된 표현을 할 때에는 두 번, 세 번 그 적절성에 대해 고민하고 신중한 자세가 필요한 듯하다


  • 성명 : 엄민아[터키/앙카라]
  • 약력 : 현) 터키 Hacet tepe 대학원 재학, 여행에세이 작가, 주앙카라 한국문화원 번역스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