싱가포르 넷플릭스 차트에서 K-콘텐츠의 위상은 이제 단순한 흥행작을 넘어 장르와 형식을 뛰어넘는 문화적 현상으로 진화하고 있다. 더 이상 로맨스 드라마에 국한되는 한류 열풍이 아니다. 2025년 8월 18일부터 24일까지의 주간 순위를 살펴보면 TV 프로그램 부문에는 드라마와 다큐멘터리가, 영화 부문에서는 케이팝을 소재로 한 애니메이션 영화가 등극했다. 싱가포르 시청자들이 이제는 다양한 스펙트럼의 한국 콘텐츠를 기꺼이 소비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영화 부문에서는 세계적으로 큰 인기를 끌고 있는 애니메이션 영화 <케이팝 데몬 헌터스(KPop Demon Hunters)>가 10주째 1위를 차지하며 그야말로 폭발적인 인기를 과시했다. 이 작품은 화려한 아이돌로 활동하는 걸그룹 헌트릭스(HUNTR/X)가 공연이 없을 때면 악령을 퇴치하는 사냥꾼으로 변신한다는 독특한 설정으로 싱가포르 시청자들의 이목을 단숨에 사로잡았다.
< '케이팝 데몬 헌터스' 관련 이벤트 - 출처: 인스타그램 계정(@universalmusg) >
이러한 성공은 싱가포르에 뿌리 깊게 자리 잡은 케이팝 열풍과 애니메이션이라는 보편적인 장르가 시너지를 낸 결과로 분석된다. 평소 애니메이션에 대한 높은 선호도를 보여온 싱가포르이기에 케이팝 아이돌의 역동적인 세계관을 담아낸 이 작품의 흥행은 어느 정도 예상 가능했다. 그러나 무려 10주 연속으로 굳건히 1위 자리를 지키는 것을 보며 이곳의 콘텐츠 소비 트렌드가 얼마나 강력하고 지속적인지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었다. 특히 영화에 등장하는 화려한 케이팝 스타일의 패션, 정교한 안무, 그리고 귀에 꽂히는 OST는 기존 팬덤을 넘어 새로운 시청자층을 유입하는 중요한 역할을 했다. <케이팝 데몬 헌터스>의 흥행은 케이팝이라는 장르가 이제 음악을 넘어 애니메이션, 영화 등 다양한 콘텐츠의 성공을 이끄는 강력한 '브랜드'가 됐음을 보여주는 사례로 평가된다. 현재 <케이팝 데몬 헌터스>가 세계적 신드롬을 만들어내고 있기에 한동안 싱가포르에서도 이 인기가 쉽게 사그라지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싱가포르 젊은 세대 사이에서는 영화 속 캐릭터를 따라 하는 댄스 챌린지나 팬아트가 활발하게 공유되는 등 온라인 문화 현상으로도 확장되고 있다.
< 1위를 기록하고 있는 한국 드라마 '에스콰이어: 변호사를 꿈꾸는 변호사들' - 출처: 넷플릭스 >
한편 싱가포르 넷플릭스 TV 프로그램 부문에서 1위를 차지한 <에스콰이어: 변호사를 꿈꾸는 변호사들>은 법정 스릴러 장르의 힘을 보여주며 싱가포르 시청자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젊은 변호사가 거대 권력의 부패에 맞서 싸우는 이야기를 중심으로 정의와 진실의 경계에서 벌어지는 치열한 법정 공방과 주인공의 심리적 갈등을 섬세하게 그려냈다. 싱가포르는 강력한 법치주의 국가라는 명성이 높은 만큼 이 작품이 다루는 법과 정의의 문제는 현지 시청자들에게 큰 공감대와 몰입감을 선사했다. 기존의 할리우드식 법정 드라마가 보여주던 전형적인 서사를 탈피하고 깊이 있는 캐릭터 묘사와 예측 불가능한 반전으로 시청자들의 추리 욕구를 자극했다는 점도 인기 요인으로 꼽힌다. 현실적인 스토리, 견고한 만듦새와 같은 <에스콰이어: 변호사를 꿈꾸는 변호사들>의 특징은 싱가포르 시청자들이 콘텐츠의 품질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한다는 점을 잘 보여준다. 또한 싱가포르가 단순히 자극적인 콘텐츠를 소비하는 것을 넘어 높은 완성도의 서사와 메시지를 갖춘 작품에 기꺼이 지갑을 여는 성숙한 시장임을 입증한다. 글로벌 히트작이 치열하게 경쟁하는 싱가포르 OTT 시장에서 한국 작품인 다큐멘터리 <나는 생존자다>가 당당히 9위에 이름을 올린 것은 매우 의미 있는 일이다. 이 다큐멘터리는 한국의 여러 비극적인 사건들을 심도 있게 조명하며 시청자들에게 큰 울림을 주었다. 이는 싱가포르 시청자층이 케이팝의 화려함 이면에 존재하는 한국 사회의 복잡하고 진지한 면모에도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 9위를 기록하고 있는 한국 다큐멘터리 '나는 생존자다' - 출처: 넷플릭스 >
특히 전 세계적으로 트루 크라임(True Crime) 장르가 인기를 끌고 있는 가운데 싱가포르 시청자들 또한 한국 사회의 이면에 숨겨진 이야기들에 깊은 관심을 보인 것으로 분석된다. 기존의 로맨틱코미디나 스릴러 드라마와는 전혀 다른 장르의 콘텐츠가 순위권에 진입했다는 것은, K-콘텐츠 소비층이 이제는 엔터테인먼트를 넘어 한국문화와 사회 전반에 대한 이해를 넓히고 싶어 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음을 의미한다. 다큐멘터리 <나는 생존자다>는 뛰어난 연출과 객관적인 시선으로 사건들을 재구성하며 높은 작품성을 인정받았고, 한국의 정치나 이슈들에 관심이 많은 싱가포르 사람들의 관심을 끌며 장르적 한계를 극복하고 상위권에 안착했다. 8월 싱가포르 넷플릭스 순위는 K-콘텐츠의 인기가 특정 장르에 국한된 일시적인 현상이 아님을 명확히 보여준다. 화려한 케이팝을 소재로 한 애니메이션 영화가 1위를 차지하고, 무거운 주제의 다큐멘터리가 상위권에 오르는 이 현상은 싱가포르 시청자들이 한국 콘텐츠의 다양성과 질적 수준을 높이 평가하고 있다는 증거다. K-콘텐츠는 로맨스 드라마나 액션 영화를 넘어 애니메이션, 다큐멘터리 등 더 넓은 영역으로 확장되며 싱가포르 대중문화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다. 이러한 다각적인 성공은 앞으로도 K-콘텐츠가 싱가포르 시장에서 굳건한 입지를 유지하며 새로운 한류를 이끌어갈 것임을 시사한다.
사진출처 및 참고자료 - 인스타그램 계정(@universalmusg), https://www.instagram.com/universalmusg/ - 넷플릭스, https://www.netflix.com/tudum/top10/singapore/tv
성명 : 신보라[한국국제문화교류진흥원 싱가포르/싱가포르 통신원] 약력 : 노보진(NovogeneAIT Genomics Singapore Pte.Ltd.) 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