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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라크 공항 가미카제 동상과 기념비

2025-11-19

주요내용

    
지난 10월 21일 일본 헌정 사상 처음으로 여성 총리가 탄생했다. 다카이치 사나에(高市早苗) 제104대 일본 총리는 자유민주당과 일본유신회 연정을 통해 총리로 선출됐다. 보수 성향 정치인인 다카이치 총리는 아베 신조 전 총리 계승자를 자처하면서 일본 헌법 제9조 개정을 주장해왔다. 헌법 제9조는 전쟁 포기 원칙을 규정하고 있으며 육·해·공군 등 전력 보유를 금지하고 국제 분쟁을 전쟁으로 해결하지 않을 것을 명시하고 있다. 다카이치 총리는 제9조를 삭제하거나 개정을 통해 군사력 보유와 집단적 자위권을 행사하겠다는 입장이다. 이를 위해 자민당과 일본유신회는 헌법 9조 개정 협의체를 설치하기로 공식 합의하는 등 협의가 구체화 단계에 들어섰다. 일본 헌법 9조가 개정되면 한국을 비롯해 아시아 지역 안보 구도에 긴장과 갈등이 심화될 것으로 보인다.

이보다 앞선 2024년 7월 8일 필리핀과 일본은 필리핀 마닐라에서 상호접근협정(Reciprocal Access Agreement)을 체결했다. 이 협정에 따라 양국 군대는 평시에 상호 영토 내에서 무기, 병력, 장비를 신속히 전개할 수 있으며 이는 합동군사훈련뿐만 아니라 재난 구호, 인도적 지원 등 다양한 목적에 활용할 수 있다. 또한 유사시 상대국에 병력을 파병하거나 장기 주둔하는 것도 법적으로 용인되는 전략적 의미가 큰 협정이다. 해당 협정을 통해 일본 자위대는 태평양 전쟁 당시 철수한 이후 약 80년 만에 필리핀에 합법적으로 진입해 훈련 및 작전에 참여할 수 있게 됐다. 필리핀과 일본은 이 협정을 계기로 사실상 '준동맹' 수준으로 군사·안보 관계를 격상시켰고, 이는 미국과 긴밀한 3국 협력 체제를 구축하며 인도·태평양 지역에서 중국에 맞서려는 전략적 조치로 풀이된다. 


필리핀 마날로 외교장관은 이날 공동 기자회견에서 "상호접근협정은 상호 국방 협력을 전례 없이 높은 수준으로 끌어올릴 것"이라고 밝혔고, 테오도로 국방장관은 "규칙에 기반한 국제 질서를 보장하기 위한 양국 공동 노력"이라고 언급했다. 이에 대해 일본 가미카와 외무상은 "법에 기반한 자유롭고 개방된 국제 질서는 지역 평화와 번영의 초석"이라고 표현했으며, 기하라 방위상은 "오늘 서명한 상호접근협정은 획기적이며 자위대와 필리핀군 사이 교류는 훨씬 더 적극적으로 진행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일본은 2022년 1월 호주와 최초로 이 협정을 맺었고 2023년 1월에는 영국, 그리고 2024년에는 아시아 국가 중에서는 처음으로 필리핀과 해당 협정을 체결했다. 필리핀은 해당 협정을 통해 남중국해 유사시 영유권 분쟁 중인 중국과 맞설 체제를 구축하려는 의도가 있다. 일본은 이를 통해 아태 지역에서 군사 패권 확대라는 전략적 이익을 도모할 수 있게 됐다.
가미카제 이스트 에어필드 첫 가미카제인 유키오 세키 중위 동상

< (좌)가미카제 이스트 에어필드, (우)첫 가미카제인 유키오 세키 중위 동상 - 출처: 통신원 촬영 >

그러나 역사적으로 필리핀과 일본은 태평양 전쟁으로 인한 깊은 상처와 비극적 과거를 공유하고 있다. 일본은 1941년 12월 8일 클라크 기지를 비롯해 필리핀 일대를 공습했다. 이에 미국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은 급하게 호주로 철수했고, 남은 미군과 필리핀군은 1942년 4월 9일 일본에 항복했다. 태평양 전쟁 기간 일본은 한국에서 인도네시아에 이르는 광범위한 점령지에서 약 20만 명에 달하는 여성을 일본군 성 노예로 강제 동원했으며 이 가운데 필리핀 출신 여성은 약 1,000명에 달했다. 일본군에서 성 노예로 끌려간 여성들은 극심한 신체적·정서적 학대에 시달리다 사망하거나 자살하는 등 참혹한 고통을 겪었다. 이로 인한 상처는 생존자와 그 가족뿐만 아니라 필리핀 사회 전체에 오래도록 깊은 흔적을 남겼다. 기록에 따르면 마닐라에만 일본군 위안소가 12곳 있었으며 세부·부뚜안·다바오를 포함한 필리핀 내 다른 지역에도 11곳이 더 있었다.  

 
태평양 전쟁 말기, 일본은 절망적인 상황에 직면하게 된다. 초기에 파죽지세로 전선을 확장했던 일본은 1944년부터 미군 반격을 받으며 악화된 전황에 당황하기 시작한다. 이러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한 전술적인 돌파구가 필요한 중대한 기로에 놓인다. 1944년 10월 17일 미군을 주축으로 한 연합군이 필리핀 중부 레이테 섬까지 진격해오자 일본 해군 중장 오니시 타키지로(大西瀧治郞)는 1944년 10월 20일 쿠라쿠 기지(クラーク基地, 현 클라크 국제공항)에서 가미카제 특공대를 창설했다. 가미카제 특공대는 1944년 10월 25일 필리핀 레이테만을 목표로 첫 공식 출격을 감행했다. 유키오 세키(関行男) 중위를 비롯한 조종사 5명이 제로 전투기를 타고 출격해 레이테만에서 교전 중이던 미 해군 함선을 향해 돌진했다. 10월 26일까지 총 항공기 55대가 출격해 가미카제 공격을 감행했으며 그 결과 미군 호위항모 3척을 비롯해 5척 이상이 격침됐고 35척 이상이 중대 및 경미한 피해를 입는 등 총 40척 이상이 피격됐다.
 
태평양 전쟁 상흔은 클라크 국제공항 인근 언덕과 주변 일대에 여전히 남아 있다. 클라크 국제공항 근처 가미카제 이스트 에어필드(Kamikaze East Airfield)에는 첫 가미카제 특공대원이었던 세키 유키오 중위를 형상화한 동상이 세워져 있다. 필리핀 국기와 일본 국기를 배경으로 화강암 받침대 위에 세워진 동상은 당시 전사자들을 추모하기 위해 필리핀 지방자치단체가 건립한 것이다. 동상으로부터 남서쪽으로 약 3km 떨어진 곳에는 가미카제 웨스트 에어필드(Kamikaze West Airfield)도 있다. 해당 장소에는 일본어로 "제2차 세계대전 중 일본 신칸(특별공격대)이 최초로 이륙한 비행장"이라는 내용이 기재돼 있다. 첫 가미카제 이륙 지점에는 평화 기념비가 세워져 있으며, 인근 언덕에는 '세키 터널'이라 불리는 방공호가 여전히 남아 있다. 두 장소 모두 과거를 추모하면서 동시에 미래로 함께 나아가기 위한 의지를 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필리핀 지방자치단체가 일본 조종사를 추모하는 동상을 건립한 것은 국가 간 화해를 우선시하는 역사 인식을 반영하는 것으로 해석된다.
제2차 세계대전 중 일본 신칸이 최초로 이륙한 비행장 일본 단체가 세운 가미카제 위령탑

< (좌)"제2차 세계대전 중 일본 신칸이 최초로 이륙한 비행장"이라는 문구가 적힌 알림판, (우)일본 단체가 세운 가미카제 위령탑 - 출처: 통신원 촬영 >

2024년에 체결돼 올해 9월 11일 발효된 상호접근협정은 필리핀과 일본 관계가 군사적으로 완전히 재편성됐음을 상징한다. 양국 장관들은 공동 성명에서 '법에 기반한 국제질서'와 '지역평화'만을 강조했으며, 태평양 전쟁 중 발생한 전쟁 범죄나 피해자 보상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중국과 영유권 분쟁에 대비하기 위한 군사적 동맹이 필요한 것은 현실이지만 이것이 과거사 청산을 미루거나 왜곡하는 명분이 돼서는 안 된다. 클라크 국제공항 일대 가미카제 추모 시설들이 보여주는 교훈은 명백하다. 가해자의 '희생'은 기념비와 동상으로 영구화되는 반면, 피해자의 '고통'은 시간과 공간에서 지워지거나 축소되는 현실에서 역사 인식에 대한 심각한 불균형을 느낄 수 있다. 이러한 불균형은 외교 수사로 포장돼 화해 진정성을 훼손하며 궁극적으로 미래 세대가 공유할 수 있는 건강한 역사 인식 토대를 약화시킨다.

현재 일본 정치 동향을 보면 우경화 추세가 뚜렷하다. 다카이치 사나에 총리에 대한 지지율 조사에 따르면 30대 이하에서 80%, 40대∼50대에서 75%, 60대 이상에서 63% 지지율을 보였다. 이는 일본의 젊은 세대가 현재 총리를 적극적으로 지지하고 있다는 것이다. 높은 지지율 그 자체가 반드시 군사대국화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러한 지지를 배경으로 일본 정부는 이전과 다른 선택을 할 수 있는 여건이 조성됐다. 앞으로 필리핀과 일본, 나아가 동아시아 전체가 지속 가능하고 진정성 있는 평화를 추구하려면 역사적 책임을 회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직시해야 할 것이다. 역사적 정의 없이 구축된 전략적 동맹은 취약하며, 언제든지 새로운 불신과 갈등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따라서 양국은 군사 협력을 강화하는 만큼 과거사에 대한 진지한 성찰과 역사 정의를 동시에 추구해야 한다. 이것이야말로 법에 기반한 국제질서를 진정하게 실현하는 길이 될 것이다.
사진 출처 및 참고자료    
- 통신원 촬영
- 《Philippines News Agency》 (2023. 3. 11). PH notes UN findings; reparations made for WWII 'comfort women', https://www.pna.gov.ph/articles/1197151
- 《Inquirer.net》 (2024. 7. 8). Philippines, Japan sign reciprocal access agreement, https://globalnation.inquirer.net/241876/philippines-japan-sign-reciprocal-access-agreement
- 《ABS-CBN》 (2025. 8. 12). ​Stronger defense ties between PH, Japan eyed as RAA takes effect September: DND, https://www.abs-cbn.com/news/nation/2025/8/12/-stronger-defense-ties-between-ph-japan-eyed-as-raa-takes-effect-september-dnd-1911
- 《Cebu Daily News》 (2025. 8. 15). Comfort women still awaiting justice 80 years after World War II’s end, https://cebudailynews.inquirer.net/652103/comfort-women-still-awaiting-justice-80-years-after-world-war-iis-end

통신원 정보

성명 : 조상우[한국국제문화교류진흥원 필리핀/앙헬레스 통신원]
약력 : 필리핀 중부루손 한인회 부회장/미디어위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