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편의를 위해 만들어진 로봇은 쓰임새가 사라졌을 때 자유롭게 폐기해도 괜찮을까. 과학기술이 발달한 세상에서 로봇을 둘러싼 윤리 문제는 오래전부터 쟁점이 돼왔다. 예술계에서는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공상과학(SF) 영화 '에이 아이(AI)'(2001) 등이 이 문제를 파고 들었다. 이 영화가 개봉한 지 20년이 지난 지금, 인간과 공존하는 로봇은 더 이상 상상 속의 존재가 아니다. 이미 산업, 의료계 등에서 폭 넓게 활용되고 있다. 14일부터 16일까지 대전예술의전당에서 초연되는 창작 오페라 '레테(The Lethe)'는 이제는 현실이 돼버린 로봇과 인간의 관계에 대해 고민하는 또 하나의 작품이다.
오페라 '레테'는 사람을 대신해 위험한 재난 지역을 수습하는 로봇의 이야기다. 제목은 다양한 의미를 포함한다. 극 중 재난 로봇의 이름이면서, 그리스신화에서 죽은 자들이 저승으로 가는 길에서 건너야 하는 망각의 강 이름이기도 하다. 지진이나 해일, 전쟁 등 재난 상황에서 인간을 구조하는 임무를 맡은 레테는 부상으로 수명이 다하면 용광로 속으로 폐기된다. 그런데 우연히 죽음을 거부하는 레테가 등장하면서 사건이 발생한다. 이를 통해 극은 관객에게 '우리의 삶은 누구의 죽음 위에 서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희곡 '노스체' '사막 속의 흰개미' 등 작품으로 문단의 주목을 받고 있는 황정은 작가가 대본을 썼다.
오페라 특성상 로봇의 이야기를 뒷받침할 음악도 궁금증을 자아낸다. 세계적인 클래식 레이블 도이치 그라모폰에서 최초로 한국 가곡('연꽃 만나고 가는 바람같이')을 녹음한 작곡가 김주원이 제작에 참여했다. 공상과학 콘텐츠라고 해서 난해한 현대음악을 선택하지는 않았다. 처음 들어도 친숙하게 즐길 수 있는 곡들이 연주될 예정이다. 탱고와 왈츠 등 서양음악부터 동요까지 다양한 멜로디가 활용됐다. 동시에 미니멀리즘 등 현대 작곡기법을 통해 음악적 긴장감도 살렸다. 진솔 대구국제방송교향악단 전임지휘자가 지휘를 맡는다. 창작극임에도 가수와 합창단, 오케스트라 단원까지 모두 60여 명이 무대에 서는 큰 작품이다.
'레테'는 대전 소재 대학들(충남대·한밭대·목원대)이 공동 주최하고, 대전 지역 예술인들이 합심해서 만든 작품이라는 점에서도 의미가 크다. 박세환ㆍ윤현정 음악감독과 합창지휘자 장명기, 피아니스트 박진영을 포함해 참여 음악인들 대다수가 대전에서 활발히 활동하고 있다. 작품을 총괄하는 전정임 예술총감독은 "과학 도시 대전의 정체성에 부합하는 상징적인 작품"이라며 "일회성이 아닌 상설공연으로 추진하면서 다른 지역에서도 공연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