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에서 최고로 권위 있는 방송사로 알려진 《BBC》의 화제작, ‘리틀 드러머 걸’(The Little Drummer Girl)의 방영이 11월 11일 일요일 저녁까지 총 3주째 방영됐다. 스파이 스릴러의 거장 존 르 카레(John Le Carre)의 최고 걸작으로 꼽히는 동명 소설에 기반한 이야기에 박찬욱 감독이 연출을 맡은 이 6부작 드라마는 이미 방영 전인 10월 14일 BIF 런던영화제에서 두 편이 공개되며 호평을 받았다. 지난 10월 27일부터 방영된 '리틀 드러머 걸'은 시각적 효과가 대단히 뛰어나 탁월한 미쟝센의 아름다움은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미쟝센을 보면 거장 감독 박찬욱의 시그너쳐를 단번에 느낄 수 있다. 반면, 영화계의 거장이 안방극장에서 주말드라마로 관객들을 만날 때, 과연 어떻게 어필할 수 있을까하는 의구심과 우려, 호기심을 갖게 되는 것 또한 사실이다.
'리틀 드러머 걸'의 첫 회는 1979년 서독, 이스라엘 대사관 담당관의 집에서 일어나는 폭탄 테러 장면으로 긴장감 있게 시작된다. 피해자는 8살 어린이와 노인이며, 팔레스타인 출신 테러리스트를 추적해오던 이스라엘 정보국의 쿠르츠(마이클 섀넌)는 테러 용의자가 자신이 쫓던 인물임을 확인하고 체포팀을 조직한다. 이어지는 주인공 찰리(플로렌스 퓨)의 오디션 장면에서 런던의 젊은 연극배우 찰리는 공연 중 객석에서 자신을 살피던 의문의 남자(알렉산데르 스카르스고르드)를 눈여겨 살펴본다. 며칠 뒤 친구들과 그리스에 있는 섬 낙소스로 여행을 떠난 그녀는 해변에서 그 객석에 있던 남자 베커와 다시 마주친다. 이 모든 장면들은 복선이 다소 많이 깔려있는데, 예를 들어 앞서 언급한 오디션 장면은 단순한 배우 오디션이 아니라 찰리의 운명을 뒤바꿀 더 거대한 오디션의 예고편이었다는 사실이 서서히 드러난다. 가령 그리스에서 찰리가 베커와 대화할 때 읽고 있던 셰익스피어의 희곡 『뜻대로 하세요』는 “온 세상은 무대요, 모든 남녀는 배우”라는 불멸의 대사로 동 작품의 상호 텍스트적 요소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 대형 연극에 휘말리는 찰리의 운명을 암시한다고 볼 수 있다.
통신원이 볼 때 상당히 복잡한 서사 구조로 설정되어 있어 1회부터 주의 깊게 보지 않은 관객에게는 줄거리를 파악하기가 상당히 어렵게 느껴질 수 있을 것 같다. 냉전 시대 서독의 수도가 있던 본 바트고데스베르크에서 베를린, 영국의 런던을 거쳐 그리스 아테네까지, 유럽에 있는 각국의 주요 도시들을 몇 분 사이에 수시로 옮겨 다니는 무대 설정은 한편으로는 긴장감이 느껴진다고 할 수 있으나 다른 한편으로는 과장스러울 정도로 비약이 심하다고 볼 수도 있을 것 같아 다소 혼란스럽다.
이런 맥락에서 영국의 일간지 《인디펜던트》의 10월 27일 자 보도는 “왜 박찬욱 감독이 6부작 텔레비전 드라마를 연출하게 되었을까”하고 약간의 의구심을 가진 청중들에게 일종의 '변론'을 펼쳤다. “'The Little Drummer Girl': 왜 박찬욱이 BBC 의 존 르 카레 스릴러에 이상하지만 완벽하게 맞는가?”라는 제목 하에 필자 에드 커밍은 “'올드 보이'의 감독 박찬욱은 강도 있는 폭력적 스타일, 화려한 관능주의 등으로 잘 알려져 일요일 저녁의 안방극장의 스릴러에는 적임자 혹은 선호도가 높은 연출자는 아니지만 그럼에도 왜 한국인 감독 박찬욱의 선택이 옳은 것인지”를 상세하게 논하고 있는 것이다.
박찬욱의 팬들은 BBC가 최근 존 르 카레의 번안 작품을 연출한다는 소식을 듣고 “잼 또는 김치를 떠올렸을지도 모르며, 내가 좋아하는 영화감독이 내가 좋아하는 소설가의 자극을 받아 만든 이번 작품이 실망스러운 결과를 낳으면 어떻게 할까”하고 약간의 우려를 했을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인디펜던트》지는 박찬욱 감독을 소개하는 데에 많은 지면을 할애했다. 박 감독의 가장 잘 알려진 작품은 '복수 3부작' (Vengeance Trilogy)으로 2002년과 2005년 사이에 그가 직접 시나리오를 쓰고 연출을 맡아 개봉한, 주제 상으로는 연관이 있지만 후속작은 아닌 일련의 영화들이다. 이 작품 중 두 번째 작품인 '올드 보이' (Old Boy)는 2004년 칸 영화제에서 그랑프리(최우수상)를 받았고 박 감독을 단번에 유명하게 만들었다. 2017년 박찬욱 감독은 “나의 경력은 기본적으로 이 수상 이전과 이후로 분리할 수 있다”고 밝힌 바 있다. 이 영화는 얼핏 보기에 억울하게 20년 동안 감옥살이를 했지만 석방되자마자 복수극을 펼치는 오대수(최민식)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박찬욱을 글로벌 스타로 만든 영화 '올드 보이' 스틸 컷 - 출처: 인디펜던트 웹사이트>
'올드 보이'는 2004년 칸 영화제 시상식의 심사위원장이었던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의 영화 세계를 연상시키지만 이보다는 훨씬 더 풍부하고 의미심장한 이야기라는 평을 많이 들었다. 2013년에는 스파이크 리(Spike Lee) 감독이 만든 미국판 리메이크가 나왔지만 이 영화는 끔찍하다는 혹평을 받았다. 하지만 타란티노와는 달리 박찬욱 감독의 영화 세계는 결코 그 자체만을 위하거나 순전한 오락만을 위한 영화는 아니라는 것이 에드 커밍의 입장이다. 영화 속의 인물들이 결국은 극단적인 상황들로 강요된 것 같이 여겨진다는 것이다. 종종 아름다운 장면들을 볼 수 있는데 시각적으로 훌륭한 순간들의 예로는 오대수가 살아있는 낙지를 먹는 장면과 망치로 복도 전체를 때려 부수는 장면들을 들 수 있다. Sympathy for Mr Vengeance 시리즈의 첫 번째 영화는 여동생에게 신장 이식을 해주기 위해 미친 듯이 돈을 벌려는 귀먹은 공장 노동자 류(신하균)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박찬욱 영화에 늘 등장하는 문제는 '우리는 왜 여기 있는가? 이 모든 것의 요점은 무엇인가’라고 할 수 있다. 1963년 출생으로 서울에서 성장한 박찬욱은 원래는 예술 비평가가 되려고 했지만 히치코크의 영화 'Vertigo'를 보고 난 후 영화로 방향을 돌렸다고 한다. 2000년도에 그의 첫 번째 성공작인 '공동경비구역' (Joint Security Area)을 만든 후에도 그는 생계유지를 위해 예술 비평을 계속 썼다고 한다. 하지만 그는 결코 많은 양의 비평을 쓰지는 않았다고 한다. 영화감독으로서의 커리어를 염두에 두고 있어서 산업계를 당황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작업에서 비평 또는 비판적인 요소들은 의심의 여지가 없이 분명하다고 할 수 있다. 히치콕의 영화들에 관해 “그의 작품들은 장르 영화들이고 초현실적인 요소들을 지니고 있으며 특정한 의미에서 부조리함을 지니고 있다”고 밝힌 바 있다. 가령 가장 예상치 못한 순간에 아주 추악하거나 잔인한 유머들을 조금씩 내보내는 것이다.
박찬욱의 최신작 '아가씨'(2016)에서도 잔인한 유머와 짓궂은 장난을 많이 찾을 수 있다. 이 '사치스럽지만 사색적인 대작'은 ‘Bafta’(British Academy Film Awards의 최우수 외국어 영화상을 수상했다. '올드 보이'가 극단적으로 폭력을 다룬 반면, '아가씨'는 극단적으로 섹스를 다룸으로써 이 두 영화는 '극단성'이란 공통점을 갖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영화감독은 청중들에게 질문들을 던진다”고 박 감독은 2016년 한 인터뷰에서 말한 바 있다. 그런데 “현대의 청중들은 제기된 문제들에 응답을 잘하지 못한다. 따라서 그들을 자극하기 위해 충격적이고 자극적인 것들을 이용해야만 한다. 이는 사람에 관한 것, 공적인 것에 관한 것이다. 그들은 더 많은 자극을 원한다. 액션 영화에서는 더욱 많은 자동차들이 부서지기를 원하는 것이다. 철학적인 질문들, 예술적인 질문들이나 도덕적인 질문들을 던질 때에도 마찬가지다. 그들이 응답하도록 더욱 많은 자극을 줄 필요가 있는 것이다.”
<지난 10월 런던영화제에 참석한 '리틀 드러머 걸'의 주연배우들.
왼쪽부터 Florence Pugh, Michael Shannon, 박찬욱 감독과 작가 John Le Carre, Alexander Skarsgard – 출처 : 인디펜던트 웹사이트>
'비 섬세한 수단들을 통해 섬세한 효과를 얻기' 위한 박 감독 특유의 테크닉은 관중들의 심사를 건드리는 사건들을 보여준 후에 비로소 원인과 동기들을 보여주는 것이다. 극단적으로 시각적인 것에 대한 관중들의 원초적인 반응은 이후에 밝혀지는 맥락에 의해 천천히 달라진다. 가끔 청중들은 줄거리가 너무 복잡하다고 느끼기도 하지만 늘 그렇지는 않다. 순전히 미적으로만 보였던 틀과 카메라 작업은 실제로는 특별한 서술 목적을 위해 사용된 것이다. 우리가 본다고 생각하는 것은 달리 말하자면 오로지 이야기의 작은 부분에 불과한 것이다. 이는 르 카레의 소설들에서 다루어지는 주제이기도 하다.
‘The Little Drummer Girl’의 6편의 에피소드들을 통해 박은 우리가 예측할 수 있는 모든 공간들을 설정하고 나서는 또 우리들을 다시 혼동시킨다. 《인디펜던트》 지의 보도는 이와 같은 스타일로 영화를 만든 박찬욱 감독이 비비시의 스파이 스릴러에는 놀라운 선택이기는 하지만 아주 잘 맞는 선택이었다고 옹호하고 있다. 첫 번째 에피소드에서 이미 우리가 포착된 대상들 또는 얼굴들을 파악하느라 머뭇거리는 사이 박은 우리의 집중력을 가지고 장난치고 있는 것이다. 카메라는 미끄러지듯이 대상과 장소, 인물들을 표류하며 이들이 표현되자마자 믿을 수 없게 또다시 사라져 버리는데, 이러한 다소 엘리트적이고 관객의 비판적 성찰을 요구하는 미학적 스타일이 과연 안방극장의 주말 연속극 관객들에게도 어필할 수 있을지 앞으로 4회의 방영을 더 지켜볼 일이다. 박찬욱 감독이 어떤 질문들을 던지고 이에 영국의 시청자들은 어떻게 응답할지 귀추가 주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