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숫자 456번이 적힌 초록색 트레이닝복을 입고 달고나 게임에 참여하는 필리핀 어린이, 아이 엄마에 따르면 아이가 입은 옷은 인터넷 쇼핑몰에서 280페소(한화 약 6,500원)에 구매했다고 한다.>
가톨릭 신자가 예전보다는 줄었다고 하지만, 그래도 여전히 열 명 중 여덟 명은 가톨릭을 믿는다는 곳이 필리핀이다. 한국에서는 핼러윈(Halloween)이라고 하면 아이들이 화려한 의상을 입고 이웃집에 돌아다니며 사탕을 받는 날 정도로 인식하는 경우가 많지만, 필리핀에서 핼러윈은 상당히 중요한 휴일 기간이 된다. 만성절 전야제에 해당하는 핼러윈(10월 31일)은 공휴일이 아니지만, 만성절(모든 성인의 날·All Saints’ Day)인 11월 1일과 위령의 날(모든 영혼의 날·All Souls’ Day)인 11월 2일은 법정 공휴일로 이 시기 필리핀 사람들은 짧으면 사흘, 길면 일주일 정도까지 긴 휴가를 보내게 된다. 코로나19로 올해는 해외여행이 어려워졌지만, 필리핀 사람들이 가장 많이 해외여행을 떠나는 때이기도 하다. 필리핀 타갈로그어로 만성절을 '운다스(undas)'라고 하는데 그리스도교의 모든 성인을 기념하는 축일이다. 운다스 다음 날인 만령절은 '알라오 낭 마가 파타이(ArawNg Mga Patay. '망자의 날'을 의미)'라고 하는데, 성인이란 칭호를 받지 못하고 고인이 된 모든 성도들의 영혼을 위로하는 날이다. 한국의 추석과 비슷하다고 볼 수 있는 명절로 고향에 있는 가족묘지를 방문하여 죽은 이들을 기리고 기억하는 날이다. 한국처럼 봉분 형태의 묘를 쓰지 않으니 벌초를 하지는 않지만, 무덤 주변을 깨끗이 청소하고 새로 색칠을 한다. 그리고 무덤 앞에 초를 밝히고 꽃을 놓아 고인을 추모한다. 그런데 필리핀에서는 묘지 방문이 상당히 즐거운 가족 행사이다. 운다스 기간이면 묘지가 24시간 개방되고, 묘지 주변으로는 각종 음식과 장난감, 생활용품 등을 파는 노점상이 즐비하게 늘어선다. 곳곳에 바비큐 그릴까지 세워져서 흡사 축제장과 같은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실상 꽃과 양초를 파는 상인들이 많다는 것 정도가 축제장과 다를 뿐이다. 제사를 지낸다거나 죽은 이에게 음식을 바치는 행위를 하지는 않지만 양손 가득 음식을 들고 묘지에 가는 사람을 흔히 볼 수 있는데, 온종일 묘지에서 준비해온 음식을 먹으며 하루를 보낸다. 헤어져 있던 가족들과 오랜만에 만나 서로 담소를 나누며 조용히 보내기도 하지만, 스피커를 들고 가서 크게 음악을 틀어 놓고 노는 경우도 많다. 대규모 묘지에서는 입구에서 일일이 방문객의 소지품을 검사하여 스피커 반입을 금지하기도 하지만, 스피커가 있거나 없거나 묘지 주변의 떠들썩함은 만성절이면 늘 볼 수 있는 풍경이었다. 하지만 코로나19 사태는 운다스의 분위기를 완전히 바꾸어두었다. 코로나19 확산 방지를 위해 작년에 이어 올해에도 필리핀 정부에서는 공원묘지와 기념 공원에 대해 폐쇄 조치를 내렸다. 폐쇄 기간은 10일 29일부터 11월 2일까지로 상당히 긴 편이다. 마닐라 노스 묘지(Manila North Cemetery)나 마닐라의 사우스 묘지(Manila South Cemetery)와 같은 곳은 방문객이 백만 명 이상을 헤아릴 정도로 많아서 묘지에서 사회적 거리두기를 지키기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묘지 방문이 어려워진 마닐라의 시민들이 향한 곳은 인근 쇼핑몰과 공원이다. 지난달 10월 16일부터 메트로 마닐라의 경보 단계 시스템(Alert Levels System)이 3단계로 완화되면서 요즘 마닐라의 쇼핑몰은 그 어느 때보다 붐비는 풍경이다. 미성년자의 실내 쇼핑몰 방문은 여전히 금지된 상태이지만, 그래도 집 밖으로의 외출 자체를 금지하던 때와는 사뭇 다른 분위기이다. 쇼핑몰에서도 만성절 기간을 앞두고 앞다투어 핼러윈 특수를 노린 각종 행사를 진행했다. 실내 쇼핑몰 방문이 어려운 아이들을 위해 드라이브 스루 방식으로 사탕을 나눠주는가 하면, 야외 공간을 가진 쇼핑몰에서는 각종 핼로윈 장식으로 쇼핑몰을 꾸몄다. 그런데 올해 마닐라의 아이들에게 디즈니 공주들과 마블 히어로들의 복장보다 더 큰 인기를 끈 것은 넷플릭스의 한국 드라마 <오징어 게임>이다. SM City Lipa, Galleria South 등의 쇼핑몰에서는 핼러윈을 상징하는 전통적인 호박이나 귀신, 마녀 등 대신 매장 직원들에게 <오징어 게임> 속 진행요원 복장을 입혀 핼러윈 분위기를 한껏 높이고 손님맞이에 나섰다. SM by the BAY에서는 애견인들을 위해 Paw Park에 드라마 속 놀이터와 같은 세트장을 마련했는데, 술래 인형까지 설치해 화제가 되었다. 강아지들을 대상으로 연 핼러윈 코스튬 대회에서는 술래 인형 복장을 한 강아지가 등장하여 사람들의 시선을 끌기도 했다.
<필리핀에서 올해 최고 인기 핼러윈 코스튬은 ‘오징어 게임’ 속 진행요원이다.>
마닐라의 많은 쇼핑몰에서 핼러윈 관련 행사가 진행되었지만, 그중에서도 마닐라의 이스트우드몰(Eastwood Mall)에서 Honeycomb Challenge란 이름의 행사를 한다고 하여 방문해보았다. 퀘존 이스트우드 시티(Eastwood City)에 있는 이스트우드몰은 1990년대 후반에 필리핀 정부에서 필리핀 최초의 IT 단지로 개발한 곳으로 필리핀 BPO 산업의 핵심지역이라고 불리는 곳이다. 18.5헥타르 규모의 쇼핑몰 중앙에는 Eastwood Mall Open Park란 이름의 공원 공간이 조성되어 있어 단순한 쇼핑 공간이라기보다는 상업과 주거, 엔터테인먼트를 아우르는 복합문화융합단지이다. 달고나 게임(Honeycomb Challange) 행사장은 공원 중앙에 마련되어 있었는데, 공원은 야외 공간으로 분류되어 아이들도 방문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쇼핑몰에서는 별도의 참여비를 받지 않고 쇼핑몰 내에서 1천 페소 이상 구매한 고객을 대상으로 행사를 진행하고 있었는데 쇼핑몰 방문객들의 큰 호응을 얻고 있었다. 아이가 달고나 게임에 참여할 수 있도록 급하게 쇼핑한 영수증을 가지고 뛰어오는 아버지가 등장하여 흐뭇한 모습을 연출하기도 했다. 단순히 달고나 사탕만을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참가자가 게임을 하는 동안 <오징어 게임> 속 진행요원 복장을 한 장난감 총을 들고 지켜보는 등 드라마 속 장면을 그대로 연출하는 모습도 상당히 인상적이었다. 쇼핑몰 측에서는 달고나 게임에 성공한 사람에게 오이시(oishi), 츄파춥스(chupachups), 멘토스(mentos) 등의 선물을 증정하고 있었는데, 참가자들이 선물보다도 드라마 속 주인공처럼 달고나 게임에 참여할 수 있다는 것 자체에 더 만족하는 모습이었다.
<마닐라의 쇼핑몰에서 열린 핼러윈 행사에 참여 중인 마닐라의 시민들. 이 행사는 10월 29일부터 31일까지 사흘에 걸쳐 진행되었다.>
<쇼핑몰에서 준비한 별 모양의 달고나>
<달고나 게임에 참여하고 있는 필리핀 사람들. 드라마 속처럼 달고나를 혀로 핥는 장면을 보여주기도 했다.>
<'오징어 게임'의 등장인물인 진행요원 복장을 한 아이들.>
<술래 인형 복장을 한 여자아이도 볼 수 있었다. 아이 엄마가 한국어로 '무궁화 꽃'을 외치는 아이가 술래 인형처럼 고개를 돌리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상당히 인상적이었다.>
※ 사진 및 영상 출처 : 통신원 촬영
성명 : 앤 킴(Anne Kim)[한국국제문화교류진흥원 필리핀/마닐라 통신원] 약력 : 프리렌서 작가, 필리핀 정보제공 블로그 운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