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의 아침 골목에서는 어디서나 김이 피어오르고 따뜻한 국물 향이 퍼진다. 쌀국수(Phở) 한 그릇이 차려지는 풍경은 베트남 사람들에게 아침 인사만큼이나 익숙한 일상이다. 길거리의 낮은 플라스틱 의자에 앉아 뜨거운 국물을 한 모금 들이켜는 순간, 그 어떤 고급 레스토랑의 코스 요리보다 선명하게 ‘베트남’을 느낄수 있다. 그런데 이 평범한 한 그릇이 지금 새로운 흐름의 중심에 서 있다. 2024년 하노이식과 남딘식 쌀국수가 국가 무형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고, 베트남 정부는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 등재를 위한 준비를 진행 중에 있다. 한 그릇의 국수가 국가의 이름을 달고 세계 무대에 오르기까지, 베트남은 지금 그 과정 한가운데 있다.

< (좌) 하노이 현지 식당에서 쌀국수를 조리하는 주방 모습과 (우) 완성된 하노이식 쌀국수 - 출처: 통신원 촬영 >
식민지 시대가 만든 혼종의 맛 쌀국수의 역사는 19세기 말 베트남 북부로 거슬러 올라간다. 쌀국수는 단일한 기원에서 탄생한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른 문화가 만나고 섞이는 과정 속에서 자연스럽게 형성되었다.쌀국수의 발상지로 알려진 곳은 옛 남딘성(현재 닌빈성)에 속한 반꾸(Vân Cù) 마을이다. 이곳은 원래 쌀로 만든 가는 면과 라이스 페이퍼(쌀 얇은 판) 를 만드는 지역으로 유명했다. 햇볕이 부족한 계절에는 건조 대신 생면 형태로 판매했는데, 도시 소비자들이 오히려 이 부드럽고 탄력 있는 식감을 선호하면서 자연스럽게 얇게 썬 면 형태가 자리 잡게 되었다. 이것이 오늘날 쌀국수 면의 기원이 되었다. 초기의 국물은 게 육수였으나, 이후 닭뼈와 돼지뼈를 거쳐 현재의 소뼈 육수로 발전했다. 특히 20세기 초 프랑스 식민지 시기, 대규모 토목 사업과 산업화가 진행되면서 음식의 형태에도 변화가 생겼다. 반꾸 마을 상인들은 프랑스인의 입맛에 맞춘 소고기 육수 국수를 판매하기 시작했고, 이것이 오늘날 쌀국수 ‘포(Phở)’로 정착하는 계기가 되었다. 반꾸에서 하노이로, 그리고 전국으로 반꾸 마을 사람들은 지게 행상으로 시작해 하노이 전역에 쌀국수 가게를 열었다.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유명 식당들 역시 이들의 손에서 탄생했다. 현재 반꾸 출신 장인들은 전국적으로 130개 이상의 식당과 다수의 면 생산 시설을 운영하고 있다. 쌀국수는 지역에 따라 뚜렷한 차이를 보인다. 하노이식은 맑고 담백한 육수에 최소한의 고명만을 얹어 본연의 맛을 강조한다. 반면 호찌민을 중심으로 한 남부식은 보다 달고 풍부한 육수에 다양한 채소와 고기를 곁들인다. 이 차이는 단순한 조리 방식의 차이를 넘어, 기후와 식재료, 역사적 경험이 반영된 결과다. 전쟁과 개혁 속에서 살아남은 음식 20세기 베트남의 격동기 속에서도 쌀국수는 형태를 바꾸며 생존해왔다. 전쟁 시기에는 재료 부족으로 간소화되었지만, 그 기본 구조는 유지되었다. 1986년 도이머이(Đổi Mới) 개혁 이후에는 시장경제 도입과 함께 식문화도 빠르게 변화했다. 다양한 재료와 조리 방식이 등장하고 외식 산업이 성장하면서 쌀국수 역시 상업적 확장을 이루었다. 2000년대 이후 해외 이주민과 관광 산업을 타고 쌀국수는 세계로 퍼져나갔다. 미국·프랑스·호주·한국 등 주요 도시 어디서나 쌀국수 간판을 볼 수 있게 됐고, 시앤엔(CNN)이 '세계에서 꼭 먹어봐야 할 50가지 음식'에 선정할 만큼 베트남 음식 문화를 대표하는 이름이 됐다. 유네스코 등재 도전: 음식에서 문화로 2024년 국가 무형문화유산 지정은 유네스코 등재를 향한 첫 단계였다. 이후 베트남 정부는 본격적으로 서류 작성에 들어갔고, 2025년 문화체육관광부가 신청 서류 완성을 공식 발표했다. 하노이시가 주관 기관을 맡아 닌빈성 등 관련 지자체와 함께 제출 절차를 마무리했으며, 현재는 유네스코의 심사 결과를 기다리고 있다. 유네스코가 주목하는 것은 음식의 맛이나 인기가 아니라 그 음식이 만들어지고 공유되는 과정에서 공동체가 어떻게 연결되고, 전통이 어떻게 다음 세대로 이어지는지가 핵심이다. 장인의 기술 전수, 가족과 공동체의 참여, 전통 시장의 지속성 같은 것들이 실질적인 평가 기준이 된다. 베트남은 이에 맞춰 쌀국수를 단순한 음식이 아닌 '생활문화'로 풀어내고 있다. 장인 네트워크를 구축하고, 전통 생산 방식을 기록하며, 거리 음식 문화를 체계적으로 보존하는 작업이 동시에 진행 중이다. 반꾸 마을의 포협회 설립과 체험형 관광지 조성 계획도 그 흐름 안에 있다. 쌀국수 날 (Pho Day) 지정 부터 해외 쌀국수 페스티벌까지 2017년 에 시작된 ‘Pho Day(12월 12일)’는 2018년 공식 기념일로 자리 잡으며 대표적인 국가 문화 행사로 확대됐다. 매년 전국 각지에서는 장인 시연, 시식 행사, 역사·문화 전시 등 다양한 프로그램이 이어지고, 연간 약 10만 명 이상이 참여하는 대규모 행사로 자리 잡았다. 이 과정에서 쌀국수를 국가 문화 자산으로 끌어올리려는 움직임도 자연스럽게 이어지고 있다. 이러한 움직임은 최근 해외에서도 확인된다. 도쿄, 서울, 싱가포르 등 아시아 주요 도시에서 열린 ‘베트남 쌀국수 페스티벌’은 쌀국수를 앞세운 문화외교의 장으로 자리 잡고 있다. 행사 현장에서는 시식뿐 아니라 전통 공연, 관광 홍보, 기업 참여 프로그램이 함께 운영되며 문화와 산업이 자연스럽게 어우러진다. 특히 일부 행사에서는 투자·무역 포럼이 함께 열리며, 쌀국수가 경제 협력 논의를 여는 계기로까지 이어지고 있다.

< 해외 ‘베트남 쌀국수 페스티벌’ 포스터 및 행사 현장 모습 (좌상단: 싱가포르, 좌하단: 일본, 우: 서울) - 출처: 베트남 관광부 보도자료, 뚜오이째(Tuổi Trẻ) 기사 >
영화 속 쌀국수: 문화 콘텐츠로의 확장 연중 최대 성수기로 꼽히는 설 연휴 기간, 2026년 2월 쌀국수를 소재로 한 영화 <쌀국수의 향기(Mùi Phở)>가 베트남 극장가에 개봉했다. 민 베타 감독이 메가폰을 잡고, 북부와 남부를 대표하는 배우 쑤언 힌과 투짱이 호흡을 맞췄다.

< 쌀국수의 향기 영화 공식 포스터 - 출처 : '베트남 박스 오피스(Vietnam Box office)' 웹사이트 >
이야기의 중심은 쌀국수 장인 무이(Mùi) 영감이다. 평생 지켜온 쌀국수 가게와 그 기술을 자식들에게 물려주려 하지만, 정작 자식들은 외면한다. 갈등이 깊어지는 과정에서 가족 사이에 묻혀 있던 진실들이 하나씩 드러나고, 영화는 웃음과 눈물을 오가며 용서와 화해로 마무리된다. 영화 속에서 쌀국수는 단순한 음식이 아니라 하나의 삶의 방식으로 그려진다. 나이 든 세대에게 쌀국수는 자존심이자 직업적 명예이고, 젊은 세대에게는 어린 시절의 기억이자 가족과 연결된 냄새다. 어느 쪽이든 쌀국수는 이야기를 끌어가는 축이다. 영화는 베트남 국내 개봉에 그치지 않고 유럽·미국·호주·일본 등 해외 시장에도 배급됐다. 음식을 매개로 베트남의 가족 문화와 전통을 세계 관객에게 직접 전달하려는 시도로, 정부가 추진해온 쌀국수 세계화 흐름과 같은 방향을 향하고 있다. 베트남에서 ‘쌀국수’는 이제 음식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유네스코 등재 추진, 해외 페스티벌, 영화에 이르기까지, 베트남은 쌀국수를 축으로 문화와 관광, 외교, 경제를 연결하는 전략을 펼치고 있다. 한국이 한류, 한국 음식과 한국 드라마를 통해 국가 이미지를 확장해온 흐름 처럼 베트남도 쌀국수를 앞세운 문화 브랜드 전략을 본격화하고 있다.
사진출처 및 참고자료 - ⟪베트남플러스(VietnamPlus)⟫ (2026. 3. 19). Vietnamese pho seeks UNESCO intangible cultural heritage of humanity status, https://en.vietnamplus.vn/vietnamese-pho-seeks-unesco-intangible-cultural-heritage-of-humanity-status-post339562.vnp - ⟪인민신문 온라인판(Nhan Dan Online)⟫ (2025. 12. 5). Pho Day festival expected to attract around 100,000 visitors, https://en.nhandan.vn/pho-day-festival-expected-to-attract-around-100000-visitors-post156350.html - ⟪뚜오이째(Tuổi Trẻ News)⟫, (2023. 10. 2). Pho becomes popular dish among Japanese in Vietnam, https://news.tuoitre.vn/pho-becomes-popular-dish-among-japanese-in-vietnam-10375910.htm - 베트남 관광부(Vietnam National Authority of Tourism) 'Pho Festival' 홈페이지, https://vietnamtourism.gov.vn/en/tags/Pho-Festival - 베트남 산업통산부(Bộ Công Thương) 보도자료(2024. 9. 24). Lễ hội Phở Việt Nam 2024 sẽ diễn ra tại Seoul, Hàn Quốc, https://congthuong.vn/le-hoi-pho-viet-nam-2024-se-dien-ra-tu-4810-tai-thu-do-seoul-han-quoc-347936.html - 베트남 박스 오피스(Vietnam Box Office), 'Mùi Phở' 웹사이트, https://boxofficevietnam.com/movie/mui-ph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