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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전히 형제', 영국에 소개된 분단 가족의 상봉

2018-09-03 한국국제문화교류진흥원

주요내용


<70년 세월도 끊지 못한 분단 가족, 이수남, 이정송 형제의 사연 - 출처 : '가디언'지 웹사이트>

 

여전히 형제: 70년 동안의 분단도 한국인 가족의 끈을 끊지는 못했다라는 가디언지의 824일 자 보도는 지난 820일부터 북한에서 3일 동안 이루어진 남북 이산가족 재상봉을 묘사하기에 아주 적합한 표현이라 할 수 있다. 2018 남북 이산가족 재상봉에 영국의 주요 일간지 가디언, 텔레그라프, 데일리 메일, , 이브닝 스탠다드등은 상당한 관심을 보였고, 수 많은 사진들이 실린 기사들을 일제히 보도했다.

 

가디언지는 820일부터 북한에서 진행된 이산가족 재상봉을 포괄적이고 상세하게 보도했다. 24일 자 기사에서는 특히 북한에 사는 그의 형 이정송(Lee Jeong-song) 씨를 만나러 간 대한민국의 이수남(Lee Su-nam) 씨의 사연을 집중적으로 전했다. 이들의 사연은 영국에 전해진 이산가족 재상봉과 그 분위기를 대변할 만한 상징성이 짙다고 볼 수 있다. 이수남 씨가 북한에 있는 한 호텔 로비로 걸어가서 거의 70년 만에 처음으로 그의 형에게 눈길을 준 순간 그는 감개무량한 감정으로 충만했다고 한다. 흐뭇한 재회였지만 그는 그에게 다가오는 남자를 알아보려고 무척 애를 썼고, 그를 다시는 보지 못할 것이라는 예감이 다시 들어 씁쓸한 순간이기도 했다. 두 형제는 복받치는 감정으로 흐느끼며 얼싸안았지만 할 말을 잃었다. 76세의 수남 씨는 86세인 이정송 씨에게 무슨 말을 해야할 지 몰랐다. 1953년에 종료된 한국 전쟁의 혼란과 희미한 기억 속에서 죽었다고 생각한 형이기 때문에 더욱 그랬다.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 포스터 - 출처 : 위키피디아>

 

지난 주, 3일 동안 89명의 대한민국 어르신들에게 60년 이상 본 적이 없는 친척들과 함께 보낼 11시간이 주어진 사건을 묘사한 가디언지의 이 보도는 가히 제목부터 2004년에 개봉된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감독 강제규) Tae Guk Gi(The Brotherhood of War)- 를 떠오르게 하기 충분했다. 커다란 차이가 있다면 이수남 씨의 사연은 영화 속의 줄거리가 아니고 실제로 일어난 사건이며 그의 형은 북한에서 살아있다가 직접 만났다는 것이다. 이산가족 재상봉은 올해 초에 시작된 남북한 간의 화해 무드를 타고 이루어진 남북한 대화 재개의 일부 현상으로 북한의 핵무기 프로그램 폐기와 관련해 세계적인 언론들이 비상한 관심을 가지고 주목하는 주요 사건 중의 하나였다.

 


<이산가족 상봉의 현장 - 출처 : ‘이브닝 스텐다드공식 홈페이지>

 

눈물을 닦고 서울에서 보낸 유년기를 기억하기 시작한 수남 씨는 오래전 일어난 일을 상세하게 기억하는 데에 어려움을 겪었다고 한다. “시간이 기억들을 흐려놓았다내 형을 늙은 사람으로 만나는 게 아주 이상했어요. 그가 아주 늙어 버렸거든요. 우리가 과거에 만났더라면 그가 우리의 기억들을 더 많이 기억할 수 있었을텐데라는 이야기를 인용한 가디언기사는 눈시울을 뜨겁게 하기에는 추상적이기까지 하다. 70년의 결별을 체험해 본 사람들의 경험을 실감하기가 쉽지 않다. 눈물을 닦으며 어린 시절을 기억하려고 애쓰는 이수남 씨의 사진이 더 감동적이기까지 하다.

 

두 형제가 마지막으로 본 것은 그의 형이 18세 때 남쪽으로 여행을 가려고 준비할 때였다. 북한군이 다가오는 것을 피하려고 했지만 정송 씨의 도주는 실패했고 그는 북한 의용군으로 끌려갔다. 전쟁이 끝난 후 정송 씨는 중국과의 국경지대에 있는 평안도에서 한 공장의 매니저로 일하며 한 평생을 보냈다. 결혼을 해서 아들을 하나 두었는데 부인과 아들은 이번의 재상봉에 동행했다. 한편 수남 씨는 서울에서 평생을 보냈다. 일생을 같은 지역에서 살았고 운전사와 경비원으로 일했다. 그는 형수에게 내내 형님 곁에서 계셔준 것에 대해 감사드렸다오랜 시간 동안 떨어져 있었어도 우리는 여전히 형제고 모두가 여전히 가족이라 덧붙였다고 한다.

 

상봉 동안 그들에게 가장 행복했던 순간은 다른 가족들과 북한 사람들로부터 떨어져, 호텔 방에서 사생활이 보호된 상태에서 만날 수 있었던 3시간이었다. 그들은 그냥 서로 아는 것들을 재확인하며 시간을 보냈다고 한다. 수남 씨는 북한에서 질이 좋다고 알려진 영양제들과 의약품들, 양말들, 속옷들, 수건들을 형에게 선물로 가져다 주었다. 정송 씨는 세 병의 독주들과 식탁보, 옷감을 만드는 장식사로 답례를 했다.

 

이번 만남은 거의 성사되지 못할뻔했다. 그동안 형이 죽었다고 믿고 57,000명의 다른 대한민국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수남 씨는 재상봉의 기회를 신청조차 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던 중 이번에 기회가 왔고 지난 725일에야 형이 살아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지난주에 이루어진 재상봉은 2015년 이래 이루어진 첫 번째 행사로 참가자들의 대부분은 나이가 들어 재상봉할 가족들이 줄어든다는 염려가 재기되고 있다. 2000년에 시작된 재상봉 프로그램은 그동안 20번이나 이루어졌다. 북한에서 돌아온 다음 날부터 형을 다시는 보지 못할 것이라는 두려움이 여전히 수남 씨를 괴롭힌다. 이번 재상봉 조직을 맡았던 적십자사도 대한민국 정부도 분단 가족들의 접촉이 어떤 형태로든 지속될 수 있을지를 장담하지 못하는 상태이다. 평생 소원이 이루어졌지만, 버스가 떠날 때 손을 흔들며 작별을 하는 형님과 그의 가족들을 보며 무척 슬펐다는 이수남 씨. 만남을 기약할 수 없는 이별이라 분단이 다시 괴롭고, 슬프고 고통스러운 시간이 다시 왔지만 두 형제가 헤어지기 전 정송 씨는 건강해야 다시 만날 수 있다며 희망찬 미래를 다짐했다고 한다 


  • 성명 : 이현선[영국/런던]
  • 약력 : 현)SOAS, University of London 재직. 독일 도르트문트 대학교 문학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