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스크바 시정부 후원, 김병화 평화재단 주최로 열린 추석 행사 1부 갈라쇼 장면>
“이 넓은 농장에 씨를 뿌려 가을에 풍년이 돌아오면/누렇게 누렇게 변해서 우거 우거져 파도 치리/에헤-뿌려라 씨를 활활 뿌려라/땅의 젖을 짜 먹고 와싹와싹 자란다.” 씨를 활활 뿌려라'라는 제목의 이 곡은 고려인 연출가이자 작가인 연성용(1909~1995)가 작사·작곡한 곡으로 1930년대 집단농장의 삶을 그린 민요다. 이 곡은 작년 카자흐스탄 영상기록보존소에서 발굴해 기증받은 선전 영상 '선봉'을 통해 처음 공개됐다. 이 시기 고려인의 창작가요나 시편에는 스탈린에 의해 강제로 이주당한 고려인들의 애환과 더불어 한민족의 리듬과 정서가 슴배 있다. 동토의 땅에서 이방인으로 살아가면서도 5천 년 동안 농경사회를 유지했던 농경민족의 정체성을 간직하려는 마음도 읽힌다. 일제 강점기 중앙아시아를 기점으로 러시아 전역에 뿌리를 내리고 사는 고려인 동포들의 추석 명절은 그래서 뼈아픈 역사 인식이 배어있다.
음력 팔월 보름. 추석(秋夕)은 수확의 기쁨을 만끽하는 날로 농경의 시작과 끝을 의미한다. 러시아는 물론 독립국가연합(구소련)에서 살고 있는 고려인들 역시 추석 행사에 참여해 명절의 의미와 민족적 동질감을 찾는다. 다민족 국가인 러시아에서 소수 민족인 고려인들이 중심이 돼 대외적으로 추석 행사를 처음 시작한 것은 2016년. 추석 연휴를 전후해 모스크바 도심에서 대규모 추석 행사를 주최하는 단체는 김병화 평화재단(이사장 로베르트 김)이다. 이 행사는 모스크바 시정부가 후원한다. 9월 29일 열린 고려인 ‘추석’ 행사는 갈라쇼를 시작으로 모스크바 참새 언덕 등지에서 모스크바 시민 1천여 명이 참여한 가운데 성황리에 개최됐다.
주최 측 대표인 로베르트 김은 소련 노동 영웅 김병화 선생의 손자로, “고려인들만이 아닌, 모스크바 시민들이 참여해 함께 어울리는 이러한 대규모 ‘추석’ 행사는 할아버지의 업적을 기리는 데도 큰 의미가 있다”고 설명했다. 김병화 선생은 콜호츠에서 한인 특유의 근면함과 성실함으로 벼농사를 성공시켜 노동 영웅으로 추앙받고 있는 인물이다. 그는 공공시설 건설과 농촌경제 향상, 농촌사회발전 등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1961년 구소련 최고 소비에트 상임위원회로부터 노동 영웅 칭호를 받았다.
로베르트 김 이사장은 “콜호츠에서 조부가 중심이 돼 고려인들과 함께 1946~50년 당시 1헥타르당 4~5t의 쌀을 생산해 냈고, 일부 작업반들은 8t까지 생산하면서 농업적 성과와 김병화의 지도력을 높이 평가한 소비에트 당국이 할아버지에게 노동 영웅 칭호를 수여했다. 그의 탁월한 농업적 조직능력과 지도력에 힘입어 콜호즈가 계속 발전해 전 소비에트 지역에 귀감이 됐었다”면서 “황토를 가꾸어 옥토로 만들고 풍년을 끌어낸 조부는 소비에트 시절에 ‘추석’같은 인물 이었다”고 강조했다. 그는 이어 “추석 행사를 통해 강제 이주에 좌절하지 않고 시대를 이끄는 선구자였던 할아버지의 유지를 받들고 있다”면서 “러시아의 소수 민족인 고려인들은 그 긍지로 일어섰고 한민족으로서 추석의 의미를 되새기고 있다”고 덧붙였다. 행사장 일대에서는 연신 풍물 소리가 귀청을 때렸고 콩과 깨, 밤 등을 넣어 빚은 오색 송편을 비롯해 풍미를 자랑하는 추석 음식이 방문객들의 식욕을 돋웠으며 푸른 눈의 현지인들이 입은 고색창연한 한복의 나부낌에 눈은 어지러웠다.
<소비에트 노동영웅 김병화 선생의 손자인 행사 주최 김병화 평화재단 이사장 로베르트 김(사진 왼쪽)>
비탈리 추치코프 모스크바시 민족 및 지역 정책부 부장은 개회 축사에서 “이번 추석 행사는 시정부의 전통이 될 것이라고 확신한다”면서 “러시아에 있어 평화와 동질감 우호를 강화하는 데 있어 이러한 프로그램은 매우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는 이어 안렉산드르 고르벤코 부시장을 대신해 “수 세기 동안 축적돼 온 추석 명절의 전통은 거듭 풍성해지고 한국인(고려인)뿐만 아니라 다른 문화에도 정신적, 물질적으로 영향을 미치고 있다”면서 “민족과 세대를 떠나 모든 이들이 하나가 되고 새로운 벗들을 만나는 계기를 마련해주고 있다”고 말했다. 행사 1부 갈라쇼에서는 고려인 동포들의 애환이 담긴 민속춤, 한국 및 러시아 노래 등으로 꾸며져 무대를 장식했다. 이어 모스크바 참새 언덕 어린이 극장에서는 고려인의 역사를 알 수 있는 다양한 출판물들이 곳곳에 비치됐고 명절 음식 만들기, 명절놀이, 종이 아트 등 체험 프로그램이 전개됐다.
<추석 행사 가운데 전통소리 맥 공연>
고려인 5세 샤사(14세, 남)는 “할아버지가 ‘너는 코리아인이다. 꼭 한국어를 배워야 한다’고 자주 말한다”면서 “송편을 처음 먹어봤다. 음식이 많아서 좋다”고 말했다. 한국에 관심이 많다는 폴리나 이바노바(26세, 여) 씨는 “추석 명절 행사를 통해 한국의 문화와 전통, 음식에 대해서 알 수 있어 좋았다”면서 “그들이 만들고 베푸는 음식처럼 고려인(한국인)은 정이 많은 민족이고 이번 행사에서 다시 한번 느꼈다”고 했다.
<행사 방문객들이 한국의 회화, 전통 공예품을 살펴보고 있다>
※ 사진 출처 : 통신원 촬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