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에노스아이레스는 런던 다음으로 세계에서 가장 많은 극장을 가진 도시다. 꼬리엔떼스 길(Av. Corrientes) 길을 따라 빼곡하게 늘어선 ‘TEATRO’라 적힌 간판은 밤거리를 현란하게 비춘다. 아주 오래되고 낡은 극장부터 현대적으로 재탄생한 극장까지 각양각색, 다양한 시대를 대표하고 있는 간판들이 사람들의 이목을 잡아끈다. 그 가운데 멀티플렉스 영화관이 아닌, 한국에서는 요즘 찾아보기 힘든 단관 영화관들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지난 연말, 이 중 두어 곳의 영화관 앞에 걸려있던 홍상수의 <그 후>의 포스터를 보고서, 또 그 후 동 영화가 주요 일간신문에 '이 주의 영화'로 선정된 것을 보면서 아르헨티나에 한국영화의 마니아층, 감독들의 추종자가 꽤 많다는 사실을 뒤늦게 실감했다.
사실 홍상수는 1999년 부에노스아이레스 국제독립영화제에 첫 출품작을 낸 것을 인연으로 해서 꾸준히 아르헨티나 관객들에게 그만의 고유한 작품세계로 자신의 이름을 알려왔다. 올해도 마찬가지로 11월 10일에 개막한 제33회 마르델 쁠라따 영화제에도 흑백 신작 영화 <강변 호텔(Hotel by the River)>를 돌아온 홍상수 감독. 현지 언론은 ‘그의 뮤즈 김민희와 함께 작업한 신작이며, 홍 감독만의 쓸쓸함을 그려내고 있다'며 그의 영화는 물론 이번 영화제에서 소개될 한국작품들을 따로 모아 소개할 정도였다.
<영화 ‘강변호텔(2018)’ 스틸 장면>
이뿐만 아니라, 9년 만에 신작을 들고나온 이창동 감독의 <버닝>도 화제작으로 떠올랐다. 아르헨티나 관객들은 이 영화를 통해 실제 한국의 계급사회의 한 단면을 볼 수 있었을 뿐 아니라, 그 안의 섬세하게 그려낸 개인의 좌절감, 한계, 주인공들 간의 갈등이 그리고 폭발하는 장면을 통해 한국의 사회도 그 어떤 사회와 다르지 않다는 점에서 공감을 표현했다. 한 평론가는 ‘거창한 이름에도 실망하지 않을 만큼의 훌륭한 콘텐츠와 시나리오, 작품성을 모두 겸비했다’며 격찬했다.
한편 다른 젊은 신예 감독들도 눈에 띈다. 임태규는 지난해 <폭력의 씨앗(The seeds of violence)>이란 작품을 통해 동 축제에 데뷔했고, 사실감 넘치는 묘사와 연기로 아르헨티나 관객들의 호평을 받은 바 있다. 올해는 <파도치는 강(The land on the waves)>이란 제목으로 또다시 퍽퍽하고 메마른 감성의 영화를 선보일 예정이다. 30여 년 만에 재회한 부자의 이야기를 다루는 영화로, 과거의 상처를 씻지 못한 아버지와 아들이 다시 만나 함께 시간을 보내지만, 좀처럼 그들의 거리는 좁혀지지 않고 또다시 아픈 역사가 반복된다는 이야기다. 연출뿐 아니라 주연배우 박정학 배우의 훌륭한 연기도 평론가들의 호평을 받았다. 장우진은 <춘천, 춘천(Autumn, Autumn)>이라는 지난해 작품에 이어서 <겨울밤에(Winter’s night)>을 가지고 더 확장된 모습으로 돌아왔다. 장우진 감독은 두 연인이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보여주는 환상적인 접근법을 통해 기대되는 신예로 주목을 받았다.
<영화 ‘겨울밤에(2018)’ 스틸 장면>
사실 한국영화는 오랫동안 아르헨티나와 한국을 이어왔던 매개체였다. 인터넷이 오늘날처럼 활성화되지 않았던 90년대부터 2000년대 초, 한국과 아무런 관련이 없는 사람들조차 영화라는 끈을 통해 한국에 대한 상상력을 키워올 수 있었다. 특히, 또 타인의 삶에 대한 호기심, 알고자 하는 욕구가 큰 아르헨티나인들은 예술, 독립영화, 소규모 제작 영화와 다큐멘터리의 관객층이 튼튼한 건 한국영화가 진입하기에 큰 장점이었다. 물론, 한국문화원 개관 후 꾸준히 진행되는 무료 영화상영과 올해로 5번째를 맞이하는 부에노스아이레스 한국영화제도 큰 기여를 해왔다. 특히 올해 9월에 개최된 한국영화제에서 상영된 <택시 운전사>는 주요 현지언론사 《파히나 도세(Pagina 12)》가 해당 영화를 주제로 기사에서 다뤄져 큰 관심을 받았다. 앞으로도 아르헨티나 내 한국영화의 인기는 계속해서 확산될 예정이다.
<제33회 마르델 쁠라따 영화제 포스터 – 출처 : 마르델 플라따 영화제 공식 홈페이지>
한편, 이번 제33회 마르델 쁠라따 영화제에는 총 51개 국가가 참가하고, 중·장편 277편이 상영된다. 개봉작으로 아나 캇츠의 <필리아폴리스의 꿈>이, 폐막작으로는 알폰소 쿠아론의 <로마>가 채택되어 마지막 날을 장식할 예정이다. 장피에르 레우드, 레오 카락스 등의 70명의 외국 영화감독들도 초청되었다. 영화제는 국제경쟁부문, 라틴아메리카 경쟁부문, 라틴아메리카 단편 경쟁부문, 아르헨티나 경쟁부문, 아르헨티나 단편 경쟁부문, 영화 음악 부문 등으로 구성된다.
※ 참고자료 : https://www.otroscines.com/nota-13935-festival-de-mar-del-plata-2018-programacion-completa-m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