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A의 실버 레이크(SIlver Lake)는 오랜 예술가 커뮤니티의 전통을 간직하고 있으면서 성소수자 친화적이고 다문화적인 동네다. 이곳에는 이탈리아, 태국, 일본, 중국, 멕시코, 인도, 페르시안 등 다양한 음식점이 혼재하며 독립 서점, 레코드숍, 요가 스튜디오, 실험적 패션 부티크 등이 즐비하다. 구불구불한 언덕길을 걷다가 한 담벼락에 붓글씨로 쓰인 한글 글귀가 눈에 들어왔다. 한석봉이 써 내려간 듯 정갈한 붓글씨로 "삶의 빈 공간을 채우는 곳"이라는 구절이, 이 도시의 낙서 가득한 벽면들 사이에서 이질적일 만큼 단정한 기운을 뿜는다. 통신원은 친구와 산책을 하던 중 '아니, 이 동네에 웬 한글 낙서?'라고 의아해했다가 다시 돌아오는 길에서야 비로소 그 옆에 자리한 간판 '공간(gong gan)'을 보고 담벼락의 붓글씨가 카페의 존재를 알리는 표지판임을 알게 됐다. 실버 레이크에는 블루보틀(BLUE BOTTLE), 스타벅스(Starbucks), 알프레드(Alfred), 인텔리젠시아(Intelligentsia)와 같은 유명 커피 브랜드가 자리해 있다. 카페 '공간'은 이 같은 흐름 속에서 튀지 않으면서도 특별한 존재감을 발한다.
< 실버 레이크를 걷다가 벽면의 한글을 보며 궁금증이 발동했다 - 출처: 통신원 촬영 >
원래 뉴욕에서 시작해 2025년 초 실버 레이크로 옮겨온 한국식 감성 카페다. 1월의 소프트 오픈 이후 디자인을 사랑하는 이, 마차 애호가, 그리고 인스타그램을 즐기는 젊은 세대 사이에서 빠르게 입소문을 탔다. 카페 '공간'은 한국의 현대 디저트 문화를 실버 레이크의 감성과 결합해 꾸밈없는 듯하면서도 섬세하게 연출됐다. 실내에 들어서면 마치 개념 미술 설치 작품에 발을 들인 듯한 기분이 든다. 추상적이고 비대칭적인 의자들이 파스텔 톤의 모듈형 소파 옆에 놓여 있고, 울퉁불퉁한 곡선의 거울과 초현실적인 인테리어 요소들이 곳곳에 배치돼 있다. 벽에는 미니멀한 한국 서예 작품이나 조형물들이 간간이 걸려 있다. 전체적으로 의도적이면서도 과하지 않은, 현대적이고 차분한 공간이다.
< 현대적이면서도 차분한 카페 '공간'의 실내 - 출처: 통신원 촬영 >
주말이면 카페 '공간'은 자신들이 주문한 라떼 아트와 머랭 아포가토를 촬영해 인스타그램에 올리는 사람들로 북적인다. 그러나 평일 오후에는 한적하고 조용한 분위기 속에서 완성도 높은 음료를 즐기며 노트북을 펼치고 작업하기에도 좋다. 이곳의 진짜 매력은 메뉴에서 드러난다. 물론 일반 라떼도 주문할 수 있지만 카페 '공간'의 음료를 제대로 경험하고 싶다면 이곳 바리스타들이 정성껏 만들어내는 창의적인 음료들을 시도하면 좋다. 콘 크림 아메리카노는 그 대표적인 예다. 아이스 아메리카노 위에 살짝 달콤한 콘브레드 맛의 크림이 얹혀 나오는 이 음료는 익숙하면서도 색다른 조합이다. 흑임자 라떼는 고소하면서도 깊은 풍미를 전해준다. 여기에 구운 떡꼬치를 함께 제공해 한국적인 정서를 더한다. 마차라떼(Matchaest)는 '공간'의 시그니처 메뉴다. 두꺼운 마차 크림이 잔 위를 덮고 있어 부드럽고 은은한 단맛이 특징이다. 또한 크림 위에 '공간'의 로고가 마차 가루로 표현되는 등 브랜드 아이덴티티가 자연스럽게 드러난다. 바리스타는 이 음료와 함께 나오는 에스프레소 샷을 넣지 말고 그대로 마시길 권한다. 가장 시선을 끄는 음료는 단연 머랭 아포가토다. 스머프 색상의 구름 모양 컵에 담겨 나오는 이 음료는 파란 머랭이 에스프레소 위에서 천천히 녹아가며 마치 퍼포먼스 같은 순간을 만들어낸다.
< 카페 '공간'의 간판 - 출처: 통신원 촬영 >
음료뿐만 아니라 음식도 만족스럽다. 카페 '공간'은 전통적인 한국 가정식을 현대적인 방식으로 재해석한 메뉴를 다양하게 선보이고 있다. 계란이 얹힌 김치볶음밥, 간장 트러플 국물의 손수제비, 갈비와 누룽지, 부침개, 샐러드와 한국 전(생선전, 고추전), 삼겹살 두부김치, 김치볶음밥, 떡볶이 등 익숙하면서도 세련된 한식 요리가 마련돼 있다. 가볍게 즐길 수 있는 유자 드레싱 비빔밥 샐러드나 반찬 샘플러도 인기가 많다. 모든 메뉴는 맛뿐만 아니라 보기도 좋다. 플레이팅 하나하나에 세심한 배려가 깃들어 있으며, 접시와 컵은 한국의 도예 작가들의 작품이거나 '공간'에서 직접 제작한 것이다. '공간'이라는 이름은 단순한 물리적 의미를 넘어선다. 한국의 미학과 철학에서 '공간'은 여백, 숨, 쉼의 개념을 내포한다. 카페 '공간'은 이 같은 의미를 실내 디자인뿐만 아니라 브랜드의 정신 속에 담아내고 있다. 바쁜 삶 속에서 잠시 멈춰 서서 느끼고, 음미할 수 있는 여유를 실버 레이크의 이웃들에게 제안하고 있다. 다양성과 창의성의 메카인 실버 레이크라는 지역성과도 잘 어울린다.
< 카페 '공간'의 외관 - 출처: 통신원 촬영 >
'공간'은 확실히 독특하다. 명확히 한국적이면서도 이국적이지 않다. 벽면의 한글 서예, 한국 시에 대한 참조, 흑임자나 떡과 같은 재료들은 문화적 뿌리를 드러낸다. 동시에 향수에 기대거나 전통에 머무르지 않고, 실험적이며 유쾌하게 새로운 시도를 이어간다. 한국계 미국인에게는 현대적으로 재해석된 한국의 향을 느낄 수 있는 공간이 되고, 비한인 고객에게는 새로운 감각 세계를 여는 문이 된다. 어느 경우든 감각적이고 감정적인 충만함을 경험할 수 있다. 음식이나 음료를 넘어 하나의 정서를 나누고자 하는 의도가 느껴진다. 그렇기에 '공간'은 그저 또 하나의 트렌디한 카페로 소비되지 않는다. 빠르게 소모되고 잊히는 유행의 시대 속에서 이곳은 조금 더 느리고 의식적인 경험을 제공한다. 숨을 고를 수 있는 장소, 존재 그 자체로 머물 수 있는 공간, 그리고 무엇보다 우리 삶의 빈자리를 맛과 미와 의미로 채워주는 곳이다. 다문화와 다양한 성소수자 친화적 커뮤니티 속에서 카페 '공간'이 어떻게 자신만의 목소리를 지켜나갈지 궁금하다.
사진출처 및 참고자료 - 통신원 촬영 - 카페 공간 인스타그램 계정(gonggan.la), https://www.instagram.com/gonggan.la/
성명 : 박지윤[한국국제문화교류진흥원 미국(LA)/LA 통신원] 약력 : 『나의 수행일지』 저자, 마인드풀 요가 명상 센터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