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연방정부 문화미디어청이 설립 20주년을 맞았다. 어떤 정부 부처가 이렇게나 거창한 기념일 행사를 열까? 독일 베를린의 '훔볼트 포룸(Humboldt Forum)'에서 열린 20주년 기념식에서는 독일 연방정부의 문화 정책에 대한 신념과 의지를 엿볼 수 있다. 극우와 혐오의 시대, 문화의 역할과 의미는 더욱더 중요해진다.
▶ 독일 문화부 20주년, '문화 없이는 전통도, 발전도 없다'
지난 10월 29일 독일 베를린의 중심가, 공사가 한창인 '훔볼트 포룸'에서 독일 연방정부 문화미디어청 설치 20주년 기념행사가 열렸다.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와 전·현직 문화 장관들, 문화, 정치, 언론 인사 등 600여 명이 참석했다. 이날 개회사에서 앙겔라 메르켈 총리는 '민주주의의 가장 큰 성과 중 하나는 바로 '문화의 자유'라고 강조하며 '문화와 미디어는 우리의 시스템과 관련이 있다. 문화 없이는 전통도, 진보도 없으며, 미디어의 자유 없이는 진정한 민주주의도 없다'고 강조했다.
<독일 연방정부 문화미디어청 설치 20주년 기념행사 포스터(좌)와 행사에 참석한 앙겔라 메르켈 총리(자주색 옷)와 문화부 장관 모니카 그뤼터스(총리 오른쪽)>
이어 연방정부 내에서 문화미디어청이 가지는 특별한 위치를 언급했다. 다른 행정부처와는 달리 독일 문화미디어청은 총리실 직속 기관으로 총리실 산하에 자리잡고 있다. 연방주의가 중시되는 문화 정책에 있어서 각 주 정부의 문화부가 더욱 큰 역할을 해왔고, 연방정부 내에서는 내무부의 한 부서로서 문화 정책 관련 업무를 보조해왔다. 그러다가 총리실 산하에 따로 문화미디어청을 설치한 것이 지난 1998년. 당시 이 연방정부 문화미디어청 설치에 대한 격렬한 논쟁이 일었다. 바이에른 주정부의 문화부 장관이었던 한스 체프마이어(Hans Zehetmair)는 연방정부의 문화부 신설은 '(바다가 접해있지 않은 내륙국가인) 스위스에 있는 해양박물관만큼이나 쓸데없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어차피 주요 문화 정책은 주 정부에서 다 실시하기 때문에 중앙집권적인 행정부처는 필요하지 않다는 의미였다. 이런 비판 속에서도 1998년 문화미디어청은 새롭게 문을 열었고, 직접 사업을 시행하기보다는 주요 문화 기관을 지원하는 방식으로 활동하고 있다.
▶연방 차원의 문화정책
문화미디어청의 특수한 형태에서 이미 독일 연방이 얼마나 문화정책을 중요하게 생각하는가를 가늠할 수 있다. 문화 예산도 계속 증가추세다. 2018년에만 문화 예산은 17억 8,000만 유로(한화 약 2조 2,885억 원)로 2017년 대비 9% 증가했다. 연방의 문화 정책은 단순히 개개 주 정부의 문화를 모은 것이 아니다. 연방정부는 특히 독일 전역에 예술과 문화, 미디어 지원을 위한 적절한 주변 환경을 만드는 데 힘쓴다. 주요 영역은 문화재 보호, 문화 교육과 문화 통합 프로젝트 후원, 영화 지원, 예술가들의 사회보험, 영화 유산과 문학 작품의 보존, 역사적인 박물관 소장품들의 디지털화다. 국내외로 문화미디어청 지원을 받는 문화기관은 74곳이 있다. 거대한 국가 문화기관인 프러이센 문화재 재단, 바이마르 클래식 재단 등이 있으며, 나치의 약탈문화재와 독일 역사의 나치와 동독 독재주의 체제 하에서의 피해자 추모와 기억 또한 문화미디어청의 주요 업무다.
▶ 비관용의 시대, 문화의 중요성
독일 연방정부가 강조하는 문화 정책의 중요성은 오늘날 더욱 절실해지고 있다. 난민들의 유입과 외국인 차별과 혐오, 이를 자양분으로 성장한 극우 정당의 득세 등 유럽 전역에서 보이는 비관용적 분위기에서 문화의 역할이 그만큼 중요하다고 본 것이다. 문화미디어청 장관 모니카 그뤼터스는 '문화의 통합적인 힘'을 강조했다. 그뤼터스 장관은 '오늘날 사회는 다양한 삶의 방식과 세계관이 어울리지 못하고 대치하고 있으며, 혐오감과 편견으로 쌓아 올린 장벽이 있다'면서 '문화는 사회적인 자기 인식에 필수적인 것으로 이러한 환경에 대항하는 담론의 힘을 가지고 있다'고 말했다.
다양성뿐만 아니라 독일인 고유의 문화를 강조하는 발언도 잊지 않았는데, 이는 최근 세력을 넓히고 있는 극우 진영도 함께 끌어안으려고 하는 접근방식이었다. 그뤼터스 장관은 '자기와 관련된 것만 신경 쓰기보다, 독일은 오늘날 세계의 파트너로서, 세계 문화의 민족과 대화에 대한 이해를 이끄는 힘이 되기를 추천한다'면서 '대화하는 힘이 있다는 이야기가 나의 자리를 잃어버린다는 의미는 아니다. 소통을 하기 위해서는 나의 태도가 중요하다. 우리의 열린 태도, 자유로운 태도, 측은지심과 연대하는 태도는 특히 우리의 그리스도적인 인간상 안에 그 뿌리가 있다' 강조했다. 이어 '다루기 힘들고, 불편하며, 자유에 대해 선동적이고 잘못된 포지션을 이끌 수 있는 문화적 다양성은, 그래서 더욱더 포퓰리즘적인 획일성에 대응할 수 있는 최고의 것'이라고 언급했다.
<대규모 복원 사업이 한창인 훔볼트포룸 전경>
▶ 독일 문화미디어청이 선택한 장소, 훔볼트 포룸
문화미디어청 20주년 행사가 열린 훔볼트 포룸도 특별한 장소다. 2019년 개관을 앞두고 아직도 공사중인 이곳은 과거 베를린 왕궁이 있었다가 동독 공산당 당사로 바뀐 곳이다. 현재 베를린 왕궁을 현대적인 개념으로 복원하고 있으며 그 용도는 바로 '문화의 소통장소'이다. 새로운 세계, 특히 비유럽권 지역을 돌면서 문화와 사회, 자연을 연구했던 알렉산더 훔볼트의 이름을 따서 '베를린 왕궁-훔볼트 포룸'이라고 명명됐다. 이곳에서는 2019년부터 '세계를 발견하는' 상시 전시가 열릴 예정인데, 인류학 박물관과 아시아 문화 박물관, 훔볼트실험실 등 베를린 주요 문화 기관이 이곳으로 자리를 옮긴다. 훔볼트 포룸은 특히 이주와 종교, 세계화 등 최신 테마에 대한 새로운 관점과 통찰력을 제공하는 장소가 될 예정이다. 연방정부 문화미디어청이 지난 20년을 축하하고 앞날을 내다보는 장소로 이곳을 선택한 것에서 독일 문화 정책의 앞날을 예측할 수 있다.
※ 사진 및 참고 자료:
https://www.humboldtforum.com/en
https://www.bundesregierung.de/breg-de/bundesregierung/staatsministerin-fuer-kultur-und-medien/ohne-kultur-keine-tradition-und-kein-fortschritt-154116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