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A 인근의 패사디나(Pasadena)에 위치한 아시안 퍼시픽 박물관(Asian Pacific Museum)에서는 지난 9월 14일부터 ‘의식과 축제(USC 퍼시픽 아트 박물관 소장품으로 본 옷감과 의복의 보물들(Ceremonies and Celebrations: Textile Treasures from the USC Pacific Asia Museum Collection)’이란 주제의 특별전시가 진행되고 있다. 이 전시는 내년 1월 5일까지 계속될 예정이다. 전시가 시작된 지 3개월 정도가 지난 12월 9일(일), 새삼스레 전시공간을 찾은 데는 다 이유가 있었다. 박물관 측에서 연말을 앞두고 지역 사회 주민들과 어린이를 위해 패밀리 페스티벌(Family Festival)을 마련했기 때문이다. 이날은 입장료도 무료였고, 아시아의 옷감과 의복에 대한 특강도 마련됐으며 ‘인형 옷 만들어 입히기’ 클래스도 열렸다. 나무젓가락으로 뼈대를 만들고 그 위에 캔버스 옷감을 자른 것을 나눠주면 참가자들이 싸인 펜과 물감, 그 외 여러 장식들을 붙여 자신만의 인형을 만드는 시간이었는데 어린이들뿐만 아니라 어른들도 다수 참가해 자신 안에 잠자고 있던 예술혼을 일깨우는 모습들이었다.
USC 퍼시픽 아트 박물관의 소장품들 중에는 중국, 한국, 일본, 인도, 히말라야의 산악지대와 동남아시아지역에서 가져온 2700여 점의 의복과 옷감들이 있는데 이번 전시에는 그 가운데 가장 빼어난 작품들을 선별해 기획됐다. 의복과 옷감들이 박물관 전시공간에 걸린다는 것은 그 자체가 하나의 축제라고 할 수 있을 만큼 특별한 기회이다. 의복과 옷감은 워낙 섬세한 원료로 제작되었으며 자연염료를 함유하고 있어 특성상 빛, 습도, 공기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파손 마모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이번에 전시된 작품들은 하나 같이 좀처럼 전시되지 않았던, 희귀한 것들이다. 이토록 아름다운 작품들을 대할 기회를 갖게 된 것에 대해 새삼스레 감사한 마음을 갖게 된다.
아시아 지역에서 의복과 옷감은 수 세기 동안 삶 자체를 보여주는 것이라 할 만큼 소중한 가치를 부여해왔다. 전시된 의복과 옷감들이 어찌나 아름답고 화려하며 오랜 시간과 노력이 투자되었는지, 들여다보고 있으면 감탄이 절로 나온다. 장인들은 옷 한 벌에 한 땀 한 땀 수를 놓으며 공동체의 이야기, 신앙체계 등 형태 없는 정신세계를 담아냈다. 이곳에 전시된 의복과 옷감들은 다양한 섬유직조 기술, 화려한 칼라, 수 세기 동안 전해져온 각 지역 문화의 고유성, 다양한 원료들을 헤아려볼 수 있게 한다. 옷감을 꾸미는 모티브나 패턴들은 아시안 커뮤니티의 신앙, 권력과 직접적인 관계가 있다. 가장 잘 짜인, 아름다운 옷감들은 의식이나 축제를 위해 따로 남겨졌었다. 특정 스타일이나 색깔, 모티브 등은 의식의 성격을 알려주는 역할을 했고 옷 입은 이의 사회적 지위 또는 그가 속한 공동체를 짐작할 수 있게 한다.
이번 전시는 4개의 주제로 나뉘어 구성됐다. 첫 번째는 ‘성별(Gender)과 옷감’이라는 주제로 공동체 속에서 성별 역할을 규정하기 위해 옷감이 제작되고 사용된 방법에 대해 살펴본다. 두 번째는 ‘옷감과 사회적 계급’에 대해, 세 번째는 아시아의 종교와 옷감의 독특한 관계에 대해 탐구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탄생, 결혼, 죽음 등 의미 있는 삶의 전환기 또는 의식에 사용되었거나 입었던 의복에 대해 살펴보고 있다. 의복과 옷감은 역사적으로 특정 종교 생활을 하는 이들을 성별해주었고 종교적인 공간과 의식에 아름다움을 더해왔다. ‘한국, 일본, 중국… 과 같은 지리적인 연관성보다 성별, 사회적 계급, 종교, 의식’이라는 시각으로 섬유와 의복을 바라보면, 왜 그렇게도 특별한 주의와 노력으로 이 옷과 옷감들이 제작되었는지를 이해할 수 있게 된다. 또한 그 옷과 옷감이 사용된 특정 목적과 함께 아시아 지역의 섬유와 의복의 다양성과 창조성도 엿볼 수 있게 된다.
이번 전시의 하이라이트는 청나라 황제의 용포와 왕실의 옷들이다. 하늘로 날아오를 것처럼 힘이 넘치는 9마리의 용이 비단옷의 앞뒤에 수놓아져 있거나 직조되어 있다. 용은 아시아에서 황제를 상징한다. 황색 가운도 눈여겨 볼만하다. 태양을 상징하기에 오직 황제만이 입을 수 있었던 황색 가운은 광서제(1875-1908)가 어린 시절 입었던 옷이다. 이번 전시에는 한국의 결혼 예복인 활옷도 포함되었다. 작품 아래 설명에 보면 활옷을 Whal-Ot이라고 음역했고 ‘호화롭고 장엄하다’는 의미로 ‘Magnificent’라는 형용사로 표현한 것을 볼 수 있다. 이 활옷은 최근 USC 퍼시픽 아트 박물관에 기증된 작품이다. 또한 일본의 기모노와 에도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는 불교 승려의 옷, 케사(Kesa)도 이번 전시에 포함됐다. 동남아시아 지역의 섬유로는 인도네시아의 이카트(Ikat) 섬유가, 그리고 파인애플의 섬유질로 제작한 필리핀의 피냐(Piña)도 전시돼 있다. 남아시아와 히말라야 지역의 화려한 색 겉옷과 인도의 우아한 비단옷, 화려하게 장식된 히말라야의 부탄왕국의 옷도 볼 수 있다.
한국의 활옷 앞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는 두 여성이 있어 다가가 봤다. 클로디아 산토스(Claudia Santos, 외교관)와 수잔 디줄리오(Susan DiGiulio, 지속가능 건축가) 두 친구는 퍼블릭 라디오를 듣고 오늘 박물관으로 나들이를 했다고 한다. 외교관으로 일본과 인도에 살았던 적이 있는 클로디아 산토스는 아시아 예술작품에 관심이 많다. 친구 수잔이 라디오에서 들었다며 오늘 아시안 퍼시픽 박물관에 가자고 했을 때 그녀로서는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클로디아와 수잔은 LA에 정말 오래도록 살았지만 한 번도 아시안 퍼시픽 박물관에 와 본 적이 없었는데 특별전시도 마련되고 있어서 오늘 드디어 와보게 되었다고 한다. 두 여성은 다른 어떤 작품보다 한국의 결혼 예복인 활옷에 오래도록 시선을 고정시켰다.
“자수와 장식 등 이 옷을 제작한 장인의 예술정신에 대해 감탄하게 됩니다. 옷에 새겨진 꽃이며 새 등의 문양에도 깊은 상징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삶의 특별한 순간을 기념하는 의식을 위해 엄청난 시간과 노력을 투자했고, 일일이 손으로 만들었네요. 요즘은 패스트패션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사람들이 옷을 너무 빨리 생산하고 너무 빨리 소비해버리는 것 같아요. 지금 보고 있는 활옷은 인간의 손과 정성이 투자된 옷은 예술작품처럼 아름다울 수 있음을 깨닫게 합니다. 저는 브라질인인데요. 브라질에서는 예전에 결혼 때 입는 특별한 옷 같은 것은 없습니다. 아시아의 문화는 여러모로 의미가 깊죠. 오늘 전시를 통해서 우리 삶의 유한함을 다시금 돌아봤습니다.” 클로디아의 말이다. 수잔 디줄리오 역시 활옷의 아름다움에 매혹되었다고 말한다. 그녀는 전 세계 여러 곳의 사람들이 각기 다른 역사적 시점에서 옷을 통해 자신을 표현하는 것에 관심이 많다.
“인간들은 어느 나라, 어느 시대에 살았던지 가장 아름답고 멋지게 보이려 애씁니다. 이슬람 사회에서의 여성은 커다란 옷감으로 머리와 온 몸을 가리도록 강요받았죠. 힌두교를 믿는 인도에서도 머리와 몸을 가리지만 그 색상과 디자인은 이슬람 세계와는 또 다릅니다. 오늘 전시를 보니 한국에서도 역사적으로 여성은 몸을 많이 가렸던 것 같아요. 이처럼 각 역사적 시대와 지역에 따라 각기 다른 재료로 옷을 만들고, 다양한 문양으로 장식하는 등의 현상은 무척 흥미로운 주제라고 생각됩니다. 시간이 허락된다면 전 세계의 전통 의복에 있어서의 패션 트렌드를 연구해보고 싶네요. 물론 현재의 옷에서도 그런 것들이 보이지만 전통적인 의복에서 그런 점들이 더 많이 부각되거든요.”
이번 전시에 걸린 한국의 옷들로는 결혼용 예복인 활옷과 장례용 예복인 상복이 포함됐다. 기쁜 날 입는 활옷은 화려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고 상복은 표백도 하지 않은, 자연 그대로의 삼베를 소재로 한 것이 극적으로 대비됐다. 멀지 않은 장래에 한국문화원 등 전시공간에서 한국의 의복에 대해서만 따로 전시해도 썩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요즘 들어 한복 패션쇼 등을 통해 한복에 대한 주류사회의 관심도 높아져 있는 데다가, 패션잡지에서 한복 웨딩드레스를 소개함으로써 한복의 이벤트 의복으로서의 가능성에 대해 주류사회가 눈을 떴기 때문이다. 내년 설을 전후하여 방탄소년단이 한복을 입고 전 세계 팬들에게 새해 인사를 하는 동영상이나 사진이 퍼져나간다면 한복에 대한 관심은 그야말로 하늘을 찌를 터이고 이를 문화사업과 연결해 한복전시를 기획해본다면 멋지고 의미 깊은 행사가 되리라, 생각된다.
<전시와 관련해 열린 특별 워크숍에 참가한 이들이 만든 옷입은 인형들>
<전시가 시작되는 출입구>
<전시회장. 멀리 한국의 상복이 보인다.>
<오래된 한국의 결혼예복, 활옷>
<용이 날아가는 형상을 수놓은 청 황제의 옷>
<꽃과 새로 장식된 활옷>
<삼베로 제작된 한국의 상복>
<활옷과 함께 전시된 노리개와 장식품들>
<청나라 때의 의상>
<중국의 결혼식 의상>
<일본의 결혼식 의상>
<활옷 앞에 선 두 여성. 왼쪽이 클로디아, 오른쪽이 수잔>
※사진 출처: 통신원 촬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