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과 한국의 왕래 1,000만 명 돌파'라는 주제의 기사 - 출처 : 뉴스위크재팬(Newsweekjapan)>
도쿄 요츠야의 한국문화원에서 개원 40주년을 기념하는 특별 기획전 ‘2019 한국 공예의 법 고대창신~ 수묵의 독백’ 개막식이 개최되었다. 황성은 원장은 취재진들과의 대화에서 “부임 전에는 일본 혐한에 대한 우려가 있었지만, 걱정할 만큼은 아니었다”고 말했다. 황 원장은 작년 10월 부임 직후 신오쿠보를 방문해 케이팝 관련 제품 판매점이나 한국 요리점에 많은 현지인이 방문하는 것을 보고 놀랐다고 한다. 일본의 본격적인 한류 붐을 되돌아보면 2003년경이 될 것이다. 《NHK-BS2》에서 드라마 <겨울연가>가 방영되면서 드라마의 주인공을 연기한 배용준의 인기가 높아졌고, 30대 이상의 여성들을 중심으로 욘사마 붐이 일어났다. 당시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가 노무현 전 대통령과의 회담에서 <겨울연가>를 언급하는 장면이 있었을 정도였다. 2005년 사극 <대장금>이 방영되면서는 한류 열풍이 일본의 남성들에게까지도 전파됐다. 당시 한국 연예계는 제2, 제3의 욘사마를 탄생시키기 위해 엔터테인먼트 사업에 본격적으로 투자하고 드라마나 영화를 일본에 수출했다. 하지만 <겨울연가>를 능가할 만큼의 폭발적인 히트작은 없었다. 또한 드라마를 필두로 한 제1차 한류 붐이 퍼진 뒤 케이팝이 제 2차 한류 붐을 견인했다. 보아, 동방신기, 빅뱅, 소녀시대, 카라 등 한국의 아이돌 가수들이 일본에서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하게 되었고, 10~20대 중심으로 한류 열풍이 일어났다. 한국의 음악 산업계에서 국내에서의 활동만으로 투자금을 회수하는 것은 사실상 어렵다. 문화체육관광부에서 음악 진흥 예산을 받은 연예 기획사들은 수익을 거두기 위해 일본 수출을 강화한 것이다. <겨울연가> 때 8,600만 달러였던 한국의 콘텐츠 수출액은 당시 3억 1,300만 달러까지 성장했다. 그중 80%는 일본에서 발생한 것으로 나타났다. 엔터테인먼트에서는 차례차례로 아이돌 그룹을 탄생시켜 아시아와 미국에 수출했지만, 2012년경에는 공급 과잉이 되면서 그늘을 보이기 시작한다. 비슷한 느낌을 가진 아이돌이 많이 복제되면서 신선함을 잃어버린 것이다. 그즈음 히트한 케이팝은 싸이의 <강남스타일> 정도밖에 없다. 또한 일본의 한류 업계에서도 <강남스타일>을 마지막으로 기세를 잃어버렸다. 동시에 반한 여론이 일어나면서 한류 관련 매장들은 속속들이 폐점하기에 이른다. 한류 붐을 견인하는 10~20대 한국 드라마나 K-Pop의 인기는 절정에 이르렀다. 동시에 한국 음식 또한 한류 열풍의 경지에 올랐다. 불고기와 김치 같은 한국 하면 떠오르는 음식뿐만 아니라, 최근 한국에서 인기가 있는 음식들 또한 확산되기 시작한 것이다. 닭고기와 야채를 매콤달콤한 양념에 볶아 치즈를 토핑한 치즈 닭갈비 등, 인기 한국 요리를 판매하는 한국 음식점이 신오쿠보에 모여들면서 일본인들로 붐비게 된다. 한류 붐이 일단락되면서 신오쿠보의 임대료 또한 하락했지만, 상승 조짐을 보이고 있다. 한식 붐을 견인하고 있는 것은 주고 10대에서 20대의 젊은 세대이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중국이 점령하고 있던 서울의 번화가 명동은 일본인으로 넘쳐났으며, 일본 현지에서 방송된 명동의 맛집들에 가면 한국인보다 일본인 손님들이 많을 정도였다. 일본과 한국의 왕래는 1,000만명을 돌파 제1차, 2차 한류 붐을 견인한 것은 30대 이상의 연령대로, 정치 정세에 상당한 영향은 주는 세대였다. 한편 제3차 한류 팬의 경우 제1차 한류 붐을 견인한 할머니나 어머니의 영향을 받으면서 성장한 세대로, 정치에 대한 관심이 얇은 세대이기도 하다. 강제징용을 둘러싼 판결과 레이더 조사 문제 등 정치적 갈등이 계속되는 가운데 일본과 한국을 왕래한 양국 국민은 1,000만 명을 돌파했다. 정치적 갈등과 문화 교류는 다른 문제라고 인식하고 있는 일본인이 증가하고 있는 것이다.
※ 참고자료 https://www.newsweekjapan.jp/stories/world/
성명 : 박하영[한국국제문화교류진흥원 일본(오사카)/오사카 통신원] 약력 : 현재) 프리랜서 에디터, 한류 콘텐츠 기획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