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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정책/이슈] 로마의 길고양이 정책 - 황제의 암살 현장에서 피어난 '고양이 공화국'

2025-09-04

주요내용

  
이탈리아 사람들에게 고양이는 단순한 반려동물을 넘어선 특별한 존재다. 고양이를 부정적으로 보는 이들도 없지 않지만 대체로 '자유롭고 우아한 영혼'으로 여긴다. 이탈리아 속담에는 "고양이는 항상 자기 발로 땅을 딛는다(Il gatto cade sempre in piedi)"라는 말이 있다. 어려움 속에서도 유연하게 살아남는 모습을 고양이에 빗댄 표현이다. 또한 "고양이를 키우면 집 안에 천사가 산다(Chi ama i gatti ha un angelo in casa)"라는 말처럼 고양이와 함께 사는 삶을 따뜻하게 바라보는 시선도 많다. 이러한 문화적 정서는 이탈리아 도시가 길고양이를 대하는 방식에도 그대로 반영돼 있다. 

로마를 여행하면 흔히 상상하는 장면이 있다. 웅장한 유적 사이를 느긋하게 거니는 길고양이, 관광객이 내미는 간식을 받아먹는 평화로운 풍경이다. 그러나 막상 시내를 꼼꼼히 돌아다녀도 길고양이가 쉽게 눈에 띄지 않아 의아해하는 사람들도 많다. 츄르까지 챙겨왔는데도 고양이가 보이지 않는다면 그 이유는 간단하다. 로마의 길고양이들은 도시 전체에 흩어져 살지 않고 특정한 장소에 모여 살고 있기 때문이다. 

그 대표적인 장소가 바로 토레 아르젠티나 광장(Largo di Torre Argentina)이다. 로마 공화정의 심장부였던 이곳은 "브루투스, 너마저!"로 유명한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암살당한 자리다. 현재는 유적 보호구역으로 일반인의 출입이 제한돼 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고양이들에게는 이곳이 '자유의 왕국'이다. 이곳이 '고양이의 집'이 된 역사는 20세기 초로 거슬러 올라간다. 1929년 대규모 발굴 작업으로 유적지가 모습을 드러낸 이후 자연스럽게 떠돌이 고양이들이 이곳에 모여들기 시작했다. 자동차나 개의 접근이 힘든 폐허는 고양이들에게 더없이 안전한 공간이었다. 이후 수십 년 동안 자원봉사자들과 유명 인사들이 발 벗고 나섰다. 길고양이에게 먹이를 주고, 중성화 수술과 치료를 제공하며, 유적을 훼손하지 않는 범위에서 보호소를 운영했다. 덕분에 토레 아르젠티나는 단순한 '길냥이 명소'를 넘어 로마의 대표적인 길고양이 보호구역으로 자리 잡았다.
토레 아르젠티나 광장의 역사적 장소에 터를 잡고 사는 길고양이

< 토레 아르젠티나 광장의 역사적 장소에 터를 잡고 사는 길고양이 - 출처: 인스타그램 계정(@gattiditorreargentina) >

로마시 당국은 길고양이를 내쫓아야 할 존재가 아니라 도시 생태계의 일부로 인정한다. 등록된 자원봉사자들에게 먹이 공급과 건강 관리 활동을 합법적으로 지원하며 유적지 내 고양이의 자유로운 생활을 묵인하고 있다. 하지만 무분별한 번식을 막기 위해 TNR(포획·중성화·방사) 프로그램을 적극적으로 운영해 개체 수를 안정적으로 유지한다. 이러한 체계적인 관리 덕분에 주민이나 관광객과의 갈등도 크게 줄어들었다. 이탈리아 사람들에게 길고양이는 귀찮은 동물이 아니라 함께 살아가는 이웃이자 도시의 일부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길고양이를 두고 '도시의 또 다른 주인(Il vero padrone della città)'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로마의 유적지 사이에서 유유히 휴식을 취하는 고양이

< 로마의 유적지 사이에서 유유히 휴식을 취하는 고양이 - 출처: 인스타그램 계정(@gattiditorreargentina) >

해가 저물면 토레 아르젠티나의 풍경은 더욱 특별해진다. 유적의 기둥 사이로 고양이들이 하나둘 모습을 드러내고 사람을 무서워하지 않는 녀석들은 다가와 인사를 건넨다. 통신원은 가끔 근처의 버블티 가게(Tè amo)에서 음료를 하나 사 들고 와 벤치에 앉아 고양이들을 구경하고는 한다. 관광객들 역시 이곳에 오면 단순히 고양이 구경을 넘어 로마가 길고양이를 어떻게 대하는지를 직접 체험할 수 있다. 고대 유적 보호와 동물 보호가 공존하는 드문 사례이기도 하다.

한국에서도 길고양이를 둘러싼 갈등은 여전히 크다. 로마의 사례는 길고양이를 도시의 일부로 인정하고 체계적으로 관리하며 시민과 함께 돌보는 방식이 충분히 가능함을 보여준다. 길고양이를 없애려 하기보다 인간과 공존할 수 있는 정책을 세우면 도시의 매력도 함께 높아진다. 토레 아르젠티나를 지나치게 된다면 억지로 츄르를 내밀며 고양이를 찾을 필요가 없다. 그들은 이미 로마 시민처럼 자유롭고 당당한 일상을 살아가고 있으니 말이다. 고대의 역사가 잠든 자리에서 오늘도 작은 고양이 공화국이 평화롭게 숨 쉬고 있다.
사진출처 및 참고자료    
- 인스타그램 계정(@gattiditorreargentina), https://www.instagram.com/gattiditorreargentina/
- 인스타그램 계정(@romeshot), https://www.instagram.com/romeshot/
- 가띠 디 로마(gatti di Roma) 홈페이지, https://www.gattidiroma.net/web/it/

통신원 정보

성명 : 백현주[한국국제문화교류진흥원 이탈리아/피사 통신원]
약력 : 이탈리아 씨어터 노 씨어터(Theatre No Theatre) 창립 멤버, 단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