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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적 추상화가 주는 휴식과 위로의 공간, 하종현 런던 개인전

2020-11-09 한국국제문화교류진흥원

주요내용

<단색화가 하종현 화백의 개인전 ‘Installation’ 전경>

영국은 여전히 코로나19로 인한 근심과 공포, 분노로 인해 들끓고 있다. 맨체스터와 노팅햄 등 일부 지역은 전면 봉쇄에 들어가는 등 지역적 부분적 봉쇄가 진행되고 있지만 영국의 심장부인 런던만큼은 아직 감염률이 상대적으로 높지는 않고, 또 다시 봉쇄할 경우 생길 경제적, 사회적, 문화적 손실이 어마어마하여 지난봄에 전면 봉쇄를 했었던 것과는 달리 10시 이후에는 주점 등이 문을 닫고 두 가정 이상이 만나는 것을 막고 레스토랑 등이 문을 닫는 등 부분적인 제한 조치를 감행하고 있는 상황이다. 하지만 보리스 존슨 총리가 다음 주에는 전면 봉쇄에 들어간다는 공표를 할 것이라는 보도가 나오고 있는 만큼 분위기는 가히 흉흉하다고 볼 수 있을 듯하다.

코로나19로 칩거한 지 수개월, 유난히 그리웠던 것 중의 하나가 런던의 갤러리들을 방문하여 그림 전람을 하는 것이었다. 물론 오페라 하우스에 가서 귀의 욕망을 충족시키는 것, 영화제에 가서 눈과 귀, 몸을 모두 호강시키는 것도 이에 포함된다. 그런데 내셔널 갤러리, 테이트 모던 등 대규모의 박물관을 다녀와서 느끼는 보람도 크지만 통신원은 특히 런던 시내에 있는 소규모의 갤러리에서 시간과 에너지 등을 조금만 투자하고도 수준 높은 최신 미술작품들을 즐기며 배울 수 있는 가성비 높은 전람회 방문이 주는 재미를 아주 좋아한다. 전면 봉쇄 전의 기회를 이용하고자 간만에 즐거운 전시회를 다녀왔다. 가을비는 계속해서 내리고 국내 안팎으로 시끄럽고 불안한 스산한 시기인데도 여느 때처럼 전시회들이 하나둘씩 열리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은둔만 하다가는 그림 구경 한번 제대로 못하고 2020년이 지나갈까 우려되어 전시장을 다녀오기로 한 것이다. 단색화 작가 하종현 작품의 색깔이 주는 신선한 느낌이 좋아 테이트 모던에서 전시 중인 양혜규전 대신 작은 규모의 갤러리행을 택했다.

단색화가 하종현(1935년 경남 산청 생) 화백의 영국 런던 개인전은 지난 10월 6일에 오픈되어 11월 14일까지 알민 레쉬 런던(Almine Rech London)갤러리에서 열리고 있다. 알민 레쉬(Almine Rech)는 파블로 피카소의 손주 며느리, 손자 베르나르 피카소의 부인으로 서양 미술계에서 손꼽히는 아트 딜러인 알민 레쉬가 운영하는 갤러리로 파리, 브뤼셀, 런던, 뉴욕에 전시장을 두고 있다. 알민 레쉬는 개념 미술과 미니멀 아트 작가들을 세계의 미술계에 꾸준히 소개해왔다. 소더비 등의 옥션 하우스는 물론 고급 화랑들이 많이 모여 있는 옥스포드 서커스 근처 그로스베너 힐(Grosvenor Hill)에 자리잡고 있는 이 갤러리의 고급스럽고 정갈한 이미지에 어울리게 전시된 하종현 화백의 단색화 작품들은 접합(Conjunction)이란 주제에 맞게 선별된 것으로, 이번 런던 전은 그의 세 번째 개인전이다. 이번 전시에서는 한국 단색화 1세대 작가이자 한국의 아방가르드 작가로 꼽히는 하종현 화백의 최근에 제작된 '접합' 연작 여러 편을 볼 수 있다. 1975년부터 지속해온 ‘접합’ 연작은 그의 작품 세계를 대표한다고 할 수 있다. 알민 레쉬 갤러리의 스탭들은 하루에 평균 10여 명의 관람객들이 다녀간다며 친절한 안내를 해주었을 뿐만 아니라 그간의 프레스에 실린 '접합' 전시 관련 보도자료들을 보내주었다.

“돌이켜보면, 나는 그림을 반드시 캔버스에 그려야한다는 생각을 포함한, 기존의 질서를 파괴하려고 했었다”고 하종현 화백은 한 인터뷰에서 밝힌 바 있다. 훗날 '단색화 운동'으로 일컬어지는 한국 전위 예술의 대표자가 된 하종현 화백의 '접합' 연작의 전위성은 회화에 관한 고정 관념을 깨는 것뿐만 아니라 서양의 백인 남성주의적 관점에서 지배되어온 미술사, 미술계를 한국적 미술을 통해 전복하겠다는 의지에서도 볼 수 있다.

실제로 그의 '접합' 연작은 캔버스 위에 물감으로 붓질을 하는 기존 회화의 고정 관념과 방식을 깨고, 캔버스 뒷면에서 물감을 밀어내는 독창적인 방법으로 추상 회화의 새로운 장을 열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마대, 밀가루, 흙, 솜, 신문지, 종이 등을 이용해 입체적인 작업을 하는가 하면 나무, 철사, 못, 로프 등의 오브제를 이용하는 등 재료 또한 기존의 것을 포기하고 새로운 것으로 사용하였다. 주목할 만한 것은 한국 전쟁을 겪은 세대인 만큼 격동의 한국사를 색깔과 화법을 통해 표현하겠다는 그의 예술적 의지가 ‘배압법’으로 알려진 그의 화법에서 나타난다는 점이다. 배압법은 미술사에서 유례를 찾을 수 없을 만큼 그 독창성을 인정받고 있으며, 영국의 미술이론가 에드워드 루시 스미스는 작가의 ‘접합’ 연작을 “같은 경향의 서양 작품과는 현격히 다른 세계를 구축했다”고 평한 바 있다.

‘접합’ 연작 이전 하종현 화백은 1960년대 중후반까지 앵포르멜 운동에 가담해 뜨거운 추상과 차가운 추상을 다양하게 선보였으며, 1969년 전위적 미술가 그룹인 한국아방가르드협회를 결성하면서 다양한 매체의 물성을 실험해 나갔다. 이후 1975년에 본격적으로 시작되어 40여 년간 지속된 ‘접합’ 연작은 시기별로 그 모습을 조금씩 변화해왔다. 1970년대 ‘접합’의 초기 실험에서는 마대와 물감의 거친 물질성이 지배적이었던 반면, 1980년대에는 뒤에서 밀고 앞에서 누르는 힘이 화면 전체에 고루 배분되어 전체적으로 세밀하고 균일한 표현 효과를 나타내 고요한 동양적 분위기가 형성된 것이다.

1990년대 이후에는 흙색, 흰색 외에도 오래된 기왓장 같은 짙은 청색 등 어둡고 선명한 색채를 사용하였으며, 2010년 이후에는 ‘이후 접합’ 연작으로 새로운 실험에 도전해 왔다. 그동안 지배적이었던 중성적이고 차분한 색상에서 벗어나 화려하게 채색한 캔버스를 잘라 이어 붙인 새로운 작업을 선보이게 되는데, 실제로 고즈넉하고 차분한 분위기를 지닌 알민 레쉬 갤러리에서 유난히 강렬한 빨강, 파랑, 하얀 색 등의 접합 작품들이 눈에 띄었다.

<강렬한 색채와 물질성이 돋보이는 하종현 런던 단색화 전시회>

그런데 이 화려하고 진한 단색화들이 전시된 공간에서 통신원은 묘한 평안함과 위로, 또 한국적인 체취를 느낄 수 있어 기분이 아주 유쾌하고 흐뭇해짐을 느꼈다. 추상적인 이미지들이 이토록 편안한 위로를 줄 수 있다는 것에 감탄해보니 하종현 화백의 단색화가 최근 들어 서구 미술계에서 관심을 받는 이유를 짐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두툼한 물감들의 조합은 그의 배압법에서 나옴직한 고통의 역사가 배인 고민의 흔적을 느끼게 하여 요즘처럼 고단한 세상을 사는 세계의 미술 애호가들에게 그 아름다움뿐만 아니라 이 단색미가 창조되기까지의 과정 또한 보여주는 셈이다.

영국의 미술평론가 마크 래폴트(Mark Rappolt)의 이번 전시 오프닝 축사에 따르면 “회화의 전통과 역사를 거부하고 고도로 복잡하고 (감정적인) 현대 생활의 체험에 연결됨으로써 하 화백의 '접합'작들은 모더니즘 회화의 지배적인 서사를 탐구할 뿐만 아니라 포말리즘에 영혼을 부여하고 당대의 실제적인 삶에 예술적 체험을 접목시키는 시도”를 보여준다. 그의 단색화는 한국 전쟁 이후 흔히 사용되었던 마대 등을 사용하여 한국적 정서를 전달해 주었는데 이로 인해 농축된 고난의 역사가 보는 이에게 공감과 편안함을 매개해 준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박서보 화백, 이우환 화백과 단색화 선두에 선 하종현 화백은 수년 전부터 유럽과 미주에서 조명받고 있으며. 최근 들어 세계적인 주목을 끌고 있는 한국의 단색화 작품을 대변하는 한 축이라고 할 수 있다. 독창적인 작품 세계로 한국 단색화의 한 경향을 뚜렷이 보여주는 하종현 작가의 런던 전시 ‘접합' 작품들은 그 가격대가 만 달러대부터 수십달러(약 1,200만원에서 수억원)까지 이른다고 한 스텝이 귀뜸해 주었다.
※ 사진 출처 : 런던 알민 레쉬(Almine Rech) 갤러리 제공
	
	

통신원 정보

성명 : 이현선[한국국제문화교류진흥원 영국/런던 통신원]
약력 : 현)SOAS, University of London 재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