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

[문화정책/이슈] 작가 미상, 가격 20만 원… 한 장의 위조 서류가 240억 클림트 걸작을 국경 밖으로 내몰았다

2025-08-06 한국국제문화교류진흥원

주요내용

  
나치 약탈의 역사에서 허술한 문화재 행정까지... 한 점의 그림이 드러낸 총체적 난맥상
백 년간 행방이 묘연했던 구스타브 클림트의 1897년작, <윌리엄 니 노르테이 도우오나 왕자의 초상(Prince William NiiNortey Dowuona; 이하 아프리카 왕자>가 지난 3월 네덜란드 마스트리히트에서 열린 '2025 TEFAF 아트페어'에 등장하며 전 세계 미술계를 흥분시켰다. 그러나 기쁨도 잠시 이 걸작이 헝가리에서 불법 반출됐다는 의혹이 제기되며 거대한 파문의 중심에 섰다.
윌리엄 니 노르테이 도우오나 왕자의 초상 사진

< 윌리엄 니 노르테이 도우오나 왕자의 초상(Prince William Nii Nortey Dowuona, 1897) - 출처: 'artnet' >

나치 약탈에서 '반환 합의'까지 100년의 여정
이 사건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시간을 100년 전으로 되돌려야 한다. <아프리카 왕자>의 원소유주는 오스트리아의 유대인 미술 수집가 어네스틴 클라인(ErnestineKlein)이었다. 《hvg.hu》에 따르면 클림트의 열렬한 후원자였던 그는 클림트 사후 5년 후 비엔나의 켄더 경매장에서 해당 작품을 구입했다. 그러나 1930년대 후반 나치의 박해를 피해 오스트리아를 떠나야 했고 이 과정에서 수많은 소장품과 함께 <아프리카 왕자> 역시 사라졌다. 클림트 미학의 정점으로 평가받는 '황금시대'의 장식적 양식을 예고하는 이 작품은 미술사적 가치가 어마어마했기에 미술계는 오랜 실종에 안타까워했다. 일각에서는 히틀러가 퇴폐 미술로 여긴 클림트의 다른 작품들처럼 소실됐을 것이라는 추측까지 나왔다.

그러나 <아프리카 왕자>는 사라지지 않았다. 알 수 없는 경로로 헝가리에 유입돼 반세기 넘게 한 개인의 수장고에 잠들어 있었던 것이다. 이 그림이 세상 밖으로 다시 나오게 된 결정적 계기는 2022년 부다페스트의 한 연구소에서 진행된 과학적 감정이었다. 미술 전문 매체 《artnet》의 보도에 따르면 감정을 진행한 조피아 베그바리(Zsófia Végvári) 연구원은 자신의 블로그에 놀라운 발견을 상세히 밝혔다. 육안으로는 식별이 어려웠을 뿐 작품 뒷면의 '클림트 유산(Gustav Klimt Nachlass)' 도장이 분명히 존재했으며 특히 "적외선 조명 아래에서만 보이는 작가의 이름이 나무 틀에서 나타났다."고 구체적으로 언급한 것이다.

바로 이 과학적 증거가 그림의 행방을 추적하던 어네스틴 클라인의 상속인들에게 전해지면서 사건은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된다. 상속인들은 현재 그림을 소장한 헝가리인과 접촉해 '반환 합의(restitution settlement)'를 맺었다. 하지만 이는 단순한 반환이 아니었다. 나치 약탈품의 경우 오랜 시간 소유관계가 복잡하게 얽혀 완전한 반환이 어려운 경우가 많다. 이번 합의 역시 현재 소유주와 어네스틴 클라인의 상속인들이 그림을 함께 판매해 수익을 나누기로 한 사실상의 '사업 계약'이었고 이 판매를 주관하기 위해 비엔나의 비너로이터 & 콜바허 갤러리(Wienerroither & Kohlbacher Gallery)가 개입했다.

허술한 행정의 허점을 파고든 예술품 불법 유출
갤러리를 통해 작품을 국제 시장에 판매하기 위해서는 먼저 헝가리 밖으로 내보내야 했다. 헝가리 문화재 보호법상 제작된 지 50년이 넘고 그 가치가 100만 포린트(약 400만 원)를 초과하는 예술품은 정부의 허가 없이는 수출이 불가능하다.

정식 허가가 어려울 것이라 판단한 관련자들은 문화재 담당 부서가 아닌 건설교통부에 작품 반출 허가를 신청했다. 오스트리아로 이주한다는 명목 아래, 1,500만 유로(약 240억 원)에 달하는 작품의 가치를 고작 5만 포린트(약 20만 원)의 '작자 미상의 서명 없는 작품'으로 허위 신고한 것이다.

결과는 놀라웠다. 담당 공무원은 이 허위 서류만 믿고 실물 확인조차 없이 '수출 허가 불필요' 확인서를 발급했다. <아프리카 왕자>는 이렇게 합법을 가장한 채 유유히 국경을 넘어 오스트리아 비엔나의 갤러리로 옮겨졌다.
아프리카 왕자 앞 관람자들

< 아프리카 왕자' 앞 관람자들 - 출처: 'hvg' >

아트페어 등장과 국제적 책임 공방
2025년 3월 네덜란드 아트페어 'TEFAF(The European Fine Art Fair)'에 약 240억 원의 가격표를 달고 화려하게 등장하며 모든 진실이 드러났다. 국보급 문화재가 허위 서류 한 장에 국경을 넘은 이 사건을 두고 관련자들은 서로에게 책임을 떠넘기는 공방을 시작했다. 비너로이터 & 콜바허 갤러리 측은 "헝가리 당국으로부터 공식 확인서를 받았기에 합법적인 절차였다."고 주장하며 "복원 전 작품 상태가 좋지 않아 진가를 알기 어려웠다."고 해명했다. 이에 헝가리 정부는 "신청인에게 속았다."고 반박하며 뒤늦게 형사 고발에 나섰다. 헝가리 건설교통부는 절차상 문제를 일부 인정하면서도 "허위 정보를 제공한 신청인에게 근본 책임이 있다."고 선을 그었다. 또한 향후 모든 예술품 반출 시 실물 심사를 의무화하는 법 개정을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오스트리아 당국과 갤러리는 헝가리의 행정 절차를 신뢰했을 뿐이라는 입장을 고수하며 책임 공방은 국제적인 문제로 비화하고 있다.
비너로이터 & 콜바허 갤러리

< 비너로이터 & 콜바허 갤러리(Wienerroither & Kohlbacher Gallery) - 출처: 'artnet' >

이번 <아프리카 왕자> 사건은 단순히 한 점의 걸작을 둘러싼 해프닝을 넘어 우리 사회에 여러 무거운 과제를 남겼다. 수백억 원 가치의 국보급 문화재가 허위 서류 한 장에 국경을 넘을 수 있었다는 사실은 실물 확인 없는 행정 편의주의가 낳은 헝가리 문화재 관리 시스템의 총체적 부실을 여실히 드러냈다. 더 나아가 나치에게 약탈당했던 비극의 상징이 상속인들에게 돌아가자마자 다시 상업적 이익을 위한 불법 행위의 대상이 됐다는 점은 예술품을 둘러싼 윤리와 상업주의의 위태로운 충돌을 보여준다. 결국 이 문제는 세계 최고 권위의 아트페어마저 자유로울 수 없었던 출처(Provenance) 논란으로 확장됐으며 갤러리와 경매소, 수집가 등 시장 참여자 모두에게 더 높은 수준의 윤리적 책임을 요구하고 있다. 유사한 사건의 재발을 막기 위한 국제적 공조와 제도적 보완이 시급한 시점이다.
사진출처 및 참고자료    
- 《Hungary Today》 (2025. 7. 16). Minister AmendsLegislation over Smuggled Klimt Painting, https://hungarytoday.hu/minister-amends-legislation-over-smuggled-klimt-painting/
- 《artnet》 (2025. 5. 27). Did a Forgotten KlimtMasterpiece Illegally Leave Hungary?, https://news.artnet.com/art-world/gustav-klimt-hungary-violation-export-restrictions-2649597
- 《hvg》 (2025. 5. 21). Lázár Jánosék miatt egyKlimt-képpel szegényebb lett az ország, https://hvg.hu/360/20250521_klimt-afrikai-herceg-portreja-becs-lazar-epitesi-miniszterium
- 《hvg》 (2025. 5. 17). Krimi a műkincspiacon:Magyarországról csempészhették ki a száz év után előbukkantKlimt-festményt, https://hvg.hu/360/20250517_hvg-elokerult-klimt-festmeny-szurke-zona

통신원 정보

성명 : 유희정[한국국제문화교류진흥원 헝가리/부다페스트 통신원]
약력 : 『한국 영화 속 주변부 여성과 미시 권력』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