헝가리인들에게 가장 중요한 명절은 언제일까? 물론 답은 개인에 따라 다르겠지만 매년 8월 20일 여름의 절정에 맞이하는 성 이슈트반의 날(Szent Istvánnapja)을 손꼽아 기다리지 않는 이는 없을 것이다. 이날은 단순히 하루를 쉬는 공휴일이 아니다. 1000년경 아시아에서 건너와 카르파티아 분지에 자리 잡았던 유목 민족 마자르(Magyar) 부족을 통일하고 국가의 생존을 위해 서유럽의 가톨릭을 국교로 받아들인 초대 국왕 이슈트반 1세(Szent István)를 기리는 건국 기념일이다. 당시 동쪽의 비잔틴 제국과 서쪽의 신성 로마 제국 사이에서 그의 선택은 신생 국가 헝가리의 운명을 건 중대한 결단이었다. 이 결단 덕분에 헝가리는 중앙 유럽의 강력한 기독교 왕국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기에 그는 오늘날까지 헝가리 민족 정체성의 시초이자 가장 위대한 국부(國父)로 존경받는다.
< 지난 8월 20일 성 이슈트반의 날의 대미를 장식한 불꽃놀이 - 출처: 성 이슈트반의 날 홈페이지 >
축제의 공식적인 시작은 오전 9시 국회의사당 앞 코슈트 광장에서 열리는 국기 게양식부터다. 그리고 이날 행사의 정수는 오후에 열리는 성스러운 오른손(SzentJobb) 행렬이다. 성스러운 오른손은 헝가리 역사상 가장 신성한 유물로 성 이슈트반의 서거 후에도 썩지 않은 채 발견돼 기적으로 여겨진 그의 오른손을 의미한다. 헝가리인들은 이 손이 국가의 법과 질서를 세운 왕의 정의로운 통치를 상징한다고 믿으며 수백 년간 지켜왔다. 화려한 황금빛 성유물함에 안치된 이 유물의 뒤를 최고위 성직자들과 군 의장대, 그리고 수많은 시민이 따르는 행렬은 천 년의 역사를 이어온 헝가리의 국가 정통성을 확인하는 경건한 순간이다. 오후가 되면 도시 전체는 축제의 열기로 가득 찬다. 평소 2만 원에 달하는 입장료를 받는 헝가리 국립 박물관과 국립 미술관 등 주요 박물관이 이날 하루 무료로 개방하는가 하면, 부다페스트 도심 한복판 자유의 광장에서 샴페인 축제가 열리는 등 다양한 행사가 진행된다. 또한 매년 이날을 기념해 발표되는 '헝가리 국가 케이크'를 맛보기 위해 길게 늘어선 줄은 이 축제가 헝가리인들의 일상에 얼마나 깊숙이 자리 잡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흥미로운 광경이다. 해가 지고 어둠이 내리면 성 이슈트반의 날의 화룡점정인 불꽃놀이를 보기 위한 수십만 명의 인파로 다뉴브강이 가득 찬다. 차량이 통제된 다리 위는 최고의 명당을 차지하려는 헝가리 시민과 관광객으로 일찌감치 발 디딜 틈이 없다. 하지만 이 화려한 축제의 이면에는 매년 반복되는 국민적 긴장감이 존재한다. 바로 2006년의 비극적인 사건 때문이다. 당시 기상 악화에도 불구하고 강행된 대규모 불꽃놀이가 허리케인급 돌풍을 만나 5명이 사망하고 수백 명이 다치는 참사로 이어졌다. 이후 헝가리인들에게 8월 20일의 날씨는 단순한 기상 정보를 넘어 국가적 관심사가 됐다. 그 트라우마를 증명하듯 강변 곳곳에는 경찰과 구급 인력이 삼엄하게 배치되고 안전을 위한 통제선은 견고하다. 다행히 올해는 맑은 날씨가 예보됐다. 오후 9시 정각, 예고된 불꽃이 밤하늘을 수놓기 시작한다. 올해 불꽃놀이의 주제는 '성인 왕들의 시대'로 헝가리 고전 음악에 맞춰 약 30분간 4만 6,000여 발의 폭죽이 자유의 다리와 에르제베트 다리 등에서 터져 나온다. 특히 국회의사당 건물 위로 쏟아지는 황금빛 불꽃과 헝가리 국기의 삼색을 형상화한 폭죽은 이번 불꽃놀이의 하이라이트로 꼽힌다. 헝가리에서 성 이슈트반의 날은 단순한 축제를 넘어선다. 그것은 천 년의 역사를 기리는 엄숙한 의식이자, 과거의 아픔을 되새기며 안전을 기원하는 공동의 기도이고, 현재의 번영을 자축하는 생동감 넘치는 축제다. 맑게 갠 밤하늘을 화려하게 수놓은 불꽃은 비극의 상처를 딛고 다시 한번 함께하는 기쁨을 나누게 된 것에 대한 안도감이자, 더 나은 미래를 향해 나아가려는 헝가리인들의 집약된 염원처럼 보인다.
사진출처 및 참고자료 - 성 이슈트반의 날 홈페이지, https://www.szentistvannap.hu/hirek/unnepeljuk-egyutt-a-szent-istvan-napot-augusztus-16-21-kozott
성명 : 유희정[한국국제문화교류진흥원 헝가리/부다페스트 통신원] 약력 : 『한국 영화 속 주변부 여성과 미시 권력』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