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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의 도시에서 열린 기억의 '보따리' 전시

2018-08-16 한국국제문화교류진흥원

주요내용

베를린은 기억의 도시다. 관광객들이 멋진 풍경을 뒤로하고 사진을 찍을 수 있는 아름다운 도시가 아니다. 베를린은 도시 곳곳에서 전쟁과 나치 범죄, 분단의 역사를 만날 수 있는 기억의 공간이다. 814일 세계 일본군 위안부 기림일과 815일 광복절을 맞아 기억의 도시 베를린에서도 의미 있는 전시와 행사들이 잇따라 열리고 있다


창작 팩토리 오감은 지난 10일 독일 베를린 베딩 지역의 예술 공간 OKK 전시장에서 '보따리'전을 열었다. '보따리'전은 여성 인권과 세계평화를 주제로 위안부 비극의 역사를 주로 다루고 있지만, 베트남전의 피해자를 함께 조명해 눈길을 끌었다. 우리나라만의 피해뿐 아니라 전시 상황에서의 여성과 어린이에 대한 폭력, 세계의 비극을 모두 담고자 한 것이다. 이 전시회에서는 평화의 소녀상을 만드는 김서경, 김운경 작가, 베트남전에서 한국군의 민간인 학살의 역사를 작품으로 전하는 고경일 작가의 작품이 전시되었고 김종도, 박현수, 이구영, 이진석, 이하, 미시마 아유미, 조아진, 최정민 작가 등 주로 시각 예술 분야에서 활동하는 예술가들이 함께 참여했다.

 


<독일 베를린에서 열린 '보따리'전에 참여한 (왼쪽부터) 김운경, 김서경, 고경일 작가>

 

11일에는 고경일, 김서경, 김운경 작가와 함께 작품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도 마련되었다. 고경일 작가가 베트남에 천착하게 된 시작점은 아이러니하게도 일본이었다고 한다. 일본유학 시절 일본의 역사 왜곡과 역사 부정을 현장에서 목도 했고, 오키나와를 거쳐 베트남까지 이르렀다. 그리고 그것이 그 작업의 시작이었다. 고경일 작가가 그린 베트남전 당시의 모습은 베트남인들의 일상과 서울의 풍경을 그린 그의 작품과는 결이 확연히 다르다. 강렬하고 무거운 색채와 분위기가 보는 이들을 압도한다. 고경일 작가는 베트남전의 민간인 학살 관련한 작품은 따뜻하게 그릴 수가 없었다면서 “'우리의 문제'였기 때문에 직설적인 방식으로 그렸다고 설명했다.

 

김서경, 김운경 작가는 소녀상이 처음 만들어지게 된 배경과 전 세계에 소녀상이 세워지고 있는, 그리고 여전히 투쟁하고 있는 과정에 대해서 이야기를 전했다. 김서경 작가는 소녀상은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이 위안부로 끌려갔을 당시의 나잇대를 형상화했고, 거칠게 잘린 단발머리와 여전히 뒷꿈치를 들고 불편하게 앉아있는 모습 등 소녀상 곳곳에 깃든 의미를 설명했다. 평화의 소녀상은 현재 독일 레겐스부르크의 공원에도 세워져 있다. 우여곡절 끝에 소녀상을 세웠지만, 일본 정부 측의 극렬한 반대 로비, 일본 극우 단체의 협박으로 결국 소녀상 아래 위안부 피해 역사를 설명해놓은 비문은 떼어지게 되었다. 하지만 이 소녀상을 통해서 위안부에 대해서 잘 알려지지 않은 독일에서도 관련 논쟁이 화제가 되고 위안부 피해자를 알리는 데 큰 역할을 하고 있다. 김서경 작가는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은 처음에는 당신들의 이야기를 하시다가 지금은 여성 운동가, 인권 운동가가 되고 있다'면서 '소녀상이 위안부 피해자뿐만 아니라 보편적인 인권의 문제 제기로 확대될 수 있기를 바라고 있다'고 말했다. 또한 소녀상을 둘러싼 많은 논쟁이 있지만, 이를 계기로 많은 행보가 이루어지는 것 자체가 할머니들의 못다 이룬 꿈을 이어가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독일 베를린에서 열린 전쟁피해 여성과 아이들을 위한 전시회 '보따리'>

 

김운경 작가는 독일은 전쟁 범죄를 사죄하고도 스스로 이를 기억하고 반성하려고 하는데, 일본은 그렇지가 않은 것 같다. 오히려 자신들이 피해자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며 독일의 기억 프로젝트 중의 하나인 '슈톨퍼슈타인(Stolpersteine)'을 언급하기도 했다. 독일 길을 걷다 보면 주로 건물 앞에 종종 볼 수 있는 금색으로 된 돌, 이 돌을 자세히 보면 과거 이곳에서 살다가 수용소로 끌려간 유대인 등 피해자들의 이름과 기록이 남아있다. 다른 돌보다 조금 튀어나와 있어 걷다 보면 발에 걸리는 경우가 있다. 그렇게 기억하는 프로젝트가 바로 독일의 한 예술가가 처음 시작한 슈톨퍼슈타인이다. 김운경 작가도 평화의 소녀상이 그렇게 곳곳에서 위안부 피해자들을 기억할 수 있는 계기가 되기를 바라고 있었다.

 

'보따리'전은 한국을 중심으로 한 가해와 피해의 역사를 다루고 있지만, 독일에서 이 주제는 이제 좀 더 보편적인 정의와 평화의 문제로 확장된다. 전시회를 기획한 고경일 작가는 이번 보따리전을 기획하면서 전쟁 시대의 여성을 주제로 삼았다. 이 문제를 나라 간의 문제뿐만 아니라 남성과 여성의 문제라는 관점에서 보려고 했다. 전쟁이라는 남성 중심적인 군사주의와 가부장적 시스템에서 나온 피해자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고 했다고 전했다.

 

이 전시회가 열리는 베를린 한 켠에서는 '우리의 몸은 당신의 전쟁터가 아니다'라는 주제로 독일 시민단체 모임에서 기획한 액션위크가 열렸다. 지난 3일부터 14일 세계 일본군 위안부 기림일까지 약 2주간 열리는 액션위크에서는 독일과 한국, 일본은 물론 베를린에 거점을 둔 전세계 여성 및 시민단체가 모두 함께 참여했다. 한국과 아시아 지역의 위안부 피해자, 중동 신자르 지역과 멕시코 등 전세계 곳곳에 현재진행형인 여성 인권의 문제를 전시회, 영화 상영, 토론회 등을 통해 폭넓게 다룬다. 독일 베를린에서 역사와 기억의 문제는 문화와 연대의 방식으로 풀어나간다. 우리만의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의 이야기를 듣고 공감하고 함께 연대하는 것이 이곳에서 싸우고 살아가는 방식이다. 우리나라의 더 많은 예술가들이 기억과 연대의 '보따리'를 싸 들고 독일을 찾아와 함께 대화할 날을 기다린다.

 

사진 출처 : 통신원 촬영


  • 성명 : 이유진[독일/베를린]
  • 약력 : 현) 라이프치히 대학원 커뮤니케이션 및 미디어학 재학중 전)2010-2012 세계일보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