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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연극 무대예술 재능기부한 전 블랙테트라 드러머 김병림 씨

2020-11-09 한국국제문화교류진흥원

주요내용

김병림(Duke Kim, 57세)씨는 현재 인테리어 시공 전문 회사인 모드 아트워크(Mod Artwork)의 대표로 일해오면서 지난 20여년간 동포사회 연극 무대의 미술 담당으로 재능을 기부해온 아티스트이다. 학창시절 그룹사운드 블랙테트라(Black Tetra, 열대어들)의 드러머이기도 했던 그는 현지의 다른 음악인들과 아비밴드(Abbey Band)를 결성해 현재까지도 음악활동도 계속하고 있다. 문화, 문화인에 대한 후원을 위해 결성된 ‘LA 문화사랑 메세나 협회’의 이사로도 활동하고 있는 그를 만나 이야기를 나눴다.


대학시절 그룹사운드 블랙테트라 드러머로 활동하셨다고요?
네. 저는 1984년도에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조소과에 입학했고 블랙테트라 9기입니다. 블랙테트라는 한국 가요계에 적잖은 영향을 끼친 그룹사운드입니다. 지금이야 아이돌 그룹 중심의 케이팝이 빌보드 차트를 석권하고 있지만 70-80년대 그룹사운드의 활동은 한국 가요계를 한 단계 업그레이드시켰던 주역들이라고 할 수 있죠.
블랙테트라 2기는 1978년 제1회 해변가요제에서 <구름과 나>로 우수상을 수상했습니다. 3기였던 고상록 선배가 만든 곡인데 2기였던 구창모 선배가 싱어로 노래를 불렀었죠. 이후 구창모 선배는 1981년 배철수 씨가 이끄는 송골매로 합류했었습니다. 블랙테트라 3기는 1979년 ‘TBC 젊은이의 가요제’에 출전해서 <심메마니>로 인기상과 작곡상을 받았습니다. 이곡 역시 고상록 선배 작품이었어요. 블랙테트라는 이후 ‘국풍 81 젊은이가요제’에도 나가 고상록 선배의 곡 <바위>로 입상했었고 1984년에는 당시 문화공보부장관배 쟁탈 전국대학 보컬그룹 경연대회에서 <망부석 사랑>으로 금상을 차지하기도 했었습니다. 제가 군에 입대했던 1986년, 저 대신 선배가 드러머로 참여한 블랙테트라 9기는 1986년 대학 가요제 본선에 출전했었습니다. 저는 제대 후에 2년 동안 블랙 테트라 9기 회장을 지내기도 했었습니다.

그후 한국과 미국에서도 음악 활동을 하셨는지요?
졸업 후 한국에서 2-3년간 ‘블랙 야생마’라는 그룹으로 활동했고 공연의 세션맨으로도 일했었어요. 그러다가 미국으로 건너와서 5년간 음악 활동을 하다가 접고 인테리어 디자인을 시작했습니다. 그 이후 꾸준히 집에서 드럼은 연주했지만 밴드 활동은 전무했다가 몇 년 전부터 또래의 뮤지션들이 의기투합해 아비밴드(Abbey Band)를 결성해 활동 중입니다.

학교 다니던 시절부터 홍대 앞에서 인테리어 디자인 일을 하셨다고 들었는데요. 그 얘기 좀 들려주세요.
대학에 처음 입학했었던 시절, 홍대 앞은 휑한 공터였어요. 1학년 다니다 보니 카페들이 하나둘 생기기 시작하더군요. 그때 건축하는 선배가 카페를 설계한다면서 함께 일하자고 해서 인테리어 디자인의 아이디어를 제공하고 함께 작업했었습니다. 당시 참여했던 카페가 ‘레지스탕스’였어요. 홍대 앞과 연대 앞, 그리고 방배동에 지점이 있었죠.

지금 홍대 앞은 한류의 메카로 외국인들이 한국 여행 시 꼭 들려보는 지역이 됐습니다. 거리 공연도 많이 있고요. 홍대 앞 카페 문화를 시작한 분으로서 요즘 홍대 앞을 보면 어떤 생각이 드시는지요?
가장 최근에 가본 것이 5년 전쯤이었고 매번 한국에 나갈 때마다 꼭 시간을 내어 홍대 앞을 찾습니다. 홍대 앞이 한류의 중심지로 변신한 것을 보면 후배들이 자랑스럽죠. 단지 카페나 클럽들만 여럿 들어선 것이 아니라 정말 개성 넘치고 테마가 있는 그런 공간들도 많더라고요. 물론 아날로그 시대의 낭만이 사라진 것 같아 좀 안타깝고 지나치게 상업화됐다는 느낌도 듭니다.

한국이 문화강국으로 전 세계 문화시장에서 경쟁력을 갖게 되기까지는 홍대 앞의 카페 문화도 분명 일조를 했다고 생각되는데요. 홍대 앞 카페 문화를 시작하신 분으로서 현재 한류의 영향력을 보면서 드는 생각은요?
음악 활동, 그리고 연극 무대 예술 관련 일을 20여 년간 하다 보니 문화만큼 무서운 게 없는 것 같습니다. 전쟁 중에도 문화가 유입되기 시작하면 싸우지 않고도 이길 수 있다는 말이 있습니다. 할리우드 영화를 보고 자라는 개발도상국가의 아이들은 미국의 슈퍼히어로가 전 세계를 구해준다는 생각을 하면서 자랄 것 같아요. 미국은 강하고 정의로우며, 슈퍼맨, 아이언맨 같은 슈퍼히어로들이 다른 나라의 악당들을 퇴치하고 전 세계를 구한다는 잘못된 인식이 심어지는 거죠. 이는 모두 문화가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문화는 그만큼 힘이 있어요. 한국도 방탄소년단과 삼성 핸드폰이 없었다면 지금과 같은 영향력을 가질 수 있었을까요? 아닙니다. 남미여행을 할 때 현지인들이 한국인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함께 사진을 찍자고 하는 것을 봤습니다. 이 모두가 방탄소년단과 삼성 핸드폰이 만들어낸 위대한 국가 ‘대한민국’의 이미지 때문입니다.

미국에 오셔서는 줄곧 인테리어 디자인 일을 하셨나요?
네. 1993년도에 미국에 와서 5년간 음악을 하다가 접고 1998년부터 인테리어 전문 시공업체인 모드 아트워크(MOD Artwork)를 시작해 오늘날에 이르고 있습니다. LA 인근의 사업체와 레스토랑, 카페 등 인테리어 설비를 주로 해왔습니다. 한인 데이빗 리(David Lee)씨가 시작한 일본식 레스토랑인 가부키(Kabuki)의 10여 개 지점에 벽화와 조각을 해넣는 작업을 했었고 LA 인근의 클럽, 바, 라운지 등의 작업을 많이 했습니다.

인테리어 디자인을 하면서 연극 무대 미술 담당을 시작하게 된 계기는 무엇인지요?
대학 재학 시, 모교인 홍익대학교에서 그룹사운드 블랙테트라와 연극반은 극장을 함께 나눠 사용하며 어울렸습니다. 당시 연극반과 블랙테트라 동아리의 지도교수가 지금은 세상을 떠나신 마광수 교수입니다. 훗날 연세대로 가셨는데 참 멋있는 교수님이었어요. 그때 공연 공간인 극장을 나눠 쓰던 연극반의 무대를 제가 많이 만들어줬더군요. 또한 블랙테트라의 공연 때도 낚싯줄을 이용해 움직이는 무대를 꾸며보는 등, 많은 시도를 해봤었습니다. 그때 연극 무대를 많이 만들어본 경험이 있었기에 훗날 LA에서 연극무대 미술 작업 하는 것이 어렵지 않았었습니다. 처음에는 제작비 지원도 정말 열악해서 대충 했었는데 에이콤의 이광진 대표를 만나면서 디테일을 살린 무대 장치를 만들기 시작했고 오늘까지 왔습니다.
그 후 제가 1997년~1998년 사이, 도자기와 조각 공방(아틀리에)을 운영했었는데요. 공간을 꾸미는 일을 한다는 것을 알게 된 한 연극 감독으로부터 연극 무대를 꾸며보라는 제의를 받게 됐습니다. 그래서 <불의 가면>이라는 극단 엘에이의 로컬 연극 무대 작업에 참여하게 됐죠. 그즈음, 선배의 소개로 공연 기획사인 에이콤의 이광진 에이콤 대표를 알게 되면서 본격적으로 연극 무대 미술 작업을 시작하게 됐습니다.

물론 대학 시절부터의 경험이 있기는 하지만 연극 무대는 생업인 인테리어 디자인과는 장르가 완전히 다른 일일 텐데요. 처음 해본 후의 느낌을 말씀해주세요.
처음 연극 무대를 만드는 작업에 참여했을 때에는 500달러 정도의 저예산으로 무대를 꾸며달라는 주문을 받았었습니다. 로컬 연극은 한국에서 연극을 했던 분들, 연극을 좋아하는 분들이 자신들이 낮에 다른 일을 하면서 얻은 수입을 바쳐가며 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제작비가 정말 열악했어요. 저의 아이디어며 직접 꾸미는 것에 대해서는 아무런 지원도 없는, 완전한 재능기부로 이뤄지는 열악한 환경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가 참여한 무대로 공연을 마쳤다는 감격이 정말 컸습니다.

지금은 많은 변화가 있겠네요. 공연을 지켜보는 객석의 분위기도 많이 달라졌을 것 같고, 언론의 반응, 작품의 수준에도 많은 변화가 있었을 것 같습니다.
초대 연극은 신문사 등 스폰서가 붙은 만큼 무대를 신경 써서 만들어야 합니다. 초청 연극의 경우, 무대제작비도 1500달러에서 2000달러 정도로 지원되고 저도 수고비로 하루 일당 정도는 받는 장족의 발전이 있었습니다.

서울에서 초청한 극단과의 작업도 많이 하셨는데 힘든 점은 없었는지요?
서울의 극단을 초청해서 하는 공연은 서울과 무대를 똑같이 만들어달라는 요구가 많이 들어옵니다. 이게 상당한 도전이었어요. 그래도 그 도전을 잘 넘겼습니다. 연극계의 대모인 손숙 선생이 최근 7년간 LA에서 3번이나 공연을 했습니다. <나의 가장 나종 지니인 것>, <어머니>, <장수상회>가 그것인데요. 손숙 씨가 공연을 마치고는 “서울 무대보다 더 완벽했다”고 칭찬해주시더군요. 손숙 선생님은 기획자인 이광진 에이콤 대표에게 “복도 많네요. 저런 아티스트들이 모두 옆에서 도와줘 멋진 무대가 만들어졌어요”라고 말씀하시더라고요.

무대 작업을 하면서 아쉬운 점은 없는지요?
매번 무대 만들 때마다 무척 아쉽습니다. 한국에서는 연극 공연이 약 한 달간 장기공연으로 진행될 때가 많습니다. 한 달 정도 공연하려면 무대 제작에 드는 기간만도 5~6개월 정도 됩니다. 그리고 공연하기 2~3일 전에 극장을 대관하기 시작해서 무대 장치를 2~3일 정도 완벽하게 설치합니다. 그런데 미국은 무대 장치를 무대 위에 설치하는 시간이 공연 당일 날 6시간 정도밖에 안 됩니다. 아틀리에에서 무대를 완벽하게 다 만들고 난 후, 큰 덩어리로 4~6조각으로 잘라서 트럭에 싣고 극장으로 가져가는데요. 보통 오전 6시부터 목수와 함께 조립하기 시작하는데 몇 시간 내로 조립해야 합니다. 하루 대관비가 어마어마하기 때문에 미리 가져다 설치할 수 없는 것이죠. 이런 일을 하다 보니, LA에서 성공한 재력가들이 시니어들이 쉴 수 있는 공간에 작은 소극장이라도 세워서 동포사회에 기부했으면 하는 바람이 생기더라고요. <독짓는 늙은이>와 같은 옛날 영화도 상영하고, 연극 공연, 콘서트 공연도 할 수 있는 공간이 생기기를 바랍니다.

현재까지 총 몇 작품이나 무대 예술로 참여하셨는지요?
로컬 연극의 경우 2000년부터 시작해 현재까지 약 20년간 10편 정도 참여했고요, 한국 초청연극의 경우는 15편 정도에 참여했습니다. 대표작들을 살펴보자면 한국에서 초청한 극단의 연극 작품으로는 <장수상회>, <할배열전>, <나의 가장 나종 지니인 것>, <어머니>, <최고의 사랑>, <싸가지 흥부전>, <품바>, <검사와 여선생>, <소리극 장날> 등이 있습니다. 로컬 극단의 작품도 여럿 했어요. 극단 서울과는 <엄마 사랑해>, <숨은 그림 찾기> 등의 작업을 했습니다. 극단 엘에이와는 <불의 가면>, <김치국씨 환장하다>를 했으며 극단 에이콤과 <봄날은 간다>, <하늘 꽃> 등 10여 편의 연극 무대 설치를 재능 기부했습니다.

현재 아비 밴드의 드러머로 다시 활동을 재개하셨다고요?
학창시절 드러머로 활동했던 것을 살려 현 아비밴드의 멤버로 드럼을 담당하고 있습니다. 아비밴드가 결성된 지도 벌써 2년이 지났습니다.

밴드는 또 어떻게 시작된 것입니까?
트럭 일을 하시던 제임스 장 씨는 모든 수입을 탁탁 털어 악기를 많이 모았고 스튜디오를 만들기도 하고, 죽기 전에 꼭 그룹 사운드에서 노래하고 싶다는 소원을 가진 분이습니다. 그런데 제가 들어오고 보니, 밴드가 자작곡은 안 하고 옛날 노래들만 하는 거였어요. 그래서 요즘은 새로운 분위기의 노래를 듣고 창작곡도 만들어 함께 소리를 맞춰보고 있습니다. 한인들을 위해 한인 축제 등의 행사에서 그동안 갈고 닦은 소리를 들려드리는 것이 바람입니다.

<연극 무대 예술가인 김병림(Duke Kim) 씨 - 출처 : 통신원 촬영>

<드럼을 연주하고 있는 김병림 씨 - 출처 :김병림 씨 제공>

<김병림 씨가 했던 장수상회의 연극 무대 - 출처 : 김병림씨 제공>

<김병림 씨가 했던 할배열전의 연극 무대 - 출처 : 김병림 씨 제공>

<김병림 씨가 했던 엄마 사랑해의 연극 무대 - 출처 : 김병림 씨 제공>

통신원 정보

성명 : 박지윤[한국국제문화교류진흥원 미국(LA)/LA 통신원]
약력 : 현) 라디오코리아 ‘저녁으로의 초대’ 진행자. 마음챙김 명상 지도자. 요가 지도자. 전) 미주 한국일보 및 중앙일보 객원기자 역임. 연세대학교 문헌정보학과 졸업. UCLA MARC(Mindful Awareness Research Center) 수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