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레이시아는 다양한 민족과 문화가 뒤섞인 다문화 국가로 알려져 있다. 이러한 말레이시아의 특색을 가장 잘 나타내는 것이 바로 ‘페라나칸(Peranakan)’이다. 페라나칸이란 이주민의 자손이라는 뜻으로 이주민의 출생지에 따라 아랍 페라나칸, 자위 페라나칸 등으로 구분되나 보통 말레이반도로 이주해 온 중국인 남성과 말레이 여성 사이에서 태어난 이들을 지칭한다. 주로 해협식민지(말레이시아 페낭과 믈라카, 싱가포르)에 공동체를 구성한 페라나칸은 중국과 말레이풍을 모두 담고 있는 독특하고 이색적인 문화를 자랑한다. 서강대학교 동아연구소 강희정 교수는 페라나칸의 정수라고 말할 수 있는 페낭의 페라나칸에 주목해 2019년 『아편과 깡통의 궁전』을 출판했고, 이 책의 학술성을 인정받아 2020년 12월 롯데출판문화대상을 수상했다. 강희정 교수를 만나 출판물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강희정 교수 – 출처 : 서강대학교 동아연구소>
안녕하세요 교수님. 페라나칸이라는 주제로 책을 집필하게 된 계기는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처음에는 페라나칸에 대해 알지 못했습니다. 2013년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린 페라나칸 특별전에서 페라나칸을 처음 접했고 세상에 이런 것이 있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이때 처음 중국적 성격이 강한 도자기가 어떻게 싱가포르까지 갔는지, 왜 싱가포르에 페라나칸 유물이 있는지 궁금했습니다. 전시 이후 페라나칸에 대한 연구를 해보겠다는 마음을 먹고 2013년 한국연구재단 저술지원사업에 지원했습니다. 이게 쉽사리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는데, 원래 중국미술사를 전공했고 당시 페라나칸에 대해 잘 몰랐기 때문에 비슷한 것이 나오겠지 생각하고 덤볐습니다. 너무나 잘 몰랐던 거죠. 공부를 하다 보니 페라나칸에 대한 연구가 끝없이 깊게 들어가는 우물처럼 느껴졌고, 머리를 쥐어짜면서 내가 왜 이걸 한다고 했을까 그런 생각도 했습니다. 하지만 매년 한국연구재단에 보고서를 제출해야 했기에 꾸역꾸역 공부를 하고 정리한 내용을 보고서로 만들었고, 해마다 낸 연구보고서를 모으고 생각을 정리해서 『아편과 깡통의 궁전』이라는 책으로 출판하게 됐습니다.<페낭 페라나칸을 다룬 책 ‘아편과 깡통의 궁전’ – 출처: 『아편과 깡통의 궁전』 강희정 저, 푸른역사 출판, 2019년>
페라나칸의 어떤 점에 매료되셨나요? 페라나칸은 혼합문화, 다문화를 보여주지만 설명할 수 없는 문화의 혼종성을 갖고 있습니다. 베이스는 중국의 색을 갖고 있지만 아주 독특합니다. 예를 들어 장식을 하는 방식은 도교나 불교적인 중국 문화와 가깝지만, 옥색과 분홍색 등의 색채는 전형적으로 동남아시아에서 찾을 수 있는 특징입니다. 하지만 공부를 하다 보니 미술과 문화보다는 아편팜, 식민지에서 영국이 세금을 거둬들이는 과정 등 역사적인 것을 많이 다루게 되어 약간 아쉬움이 남아 있습니다. 교수님의 책을 보면 방대한 자료가 정리되어 있고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직접 페낭에서 사진도 촬영하신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출판을 위해 어떤 준비를 하셨나요? 페낭을 3회 이상 방문하면서 켁록시와 주변 사찰, 페낭 페라나칸 맨션, 블루 맨션 등 박물관을 다녔습니다. 되도록이면 책에 넣을 수 있는 사진을 직접 촬영하려고 했습니다. 페낭 페라나칸 맨션에는 19세기에서 20세기 초 페라나칸이 수입한 유리제품, 도자기 등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박물관 소유 유물이 아닌 외부에서 빌려 전시한 수집품이 섞여 있었고 이를 구분하기 어려워 실제 박물관 소유의 페라나칸 도자기나 민속적인 옷, 신발 자료는 조사하지 못했습니다. 또 가이드 없이 페낭을 돌아다녀 당시 시대적 상황을 구체적으로 듣지 못한 것이 아쉬움으로 남아 있습니다. 이밖에 논문이나 책은 서울에서 찾은 것이 더 많았고, 2016년 캐나다에서 안식년을 보내면서 관련 자료를 수집했습니다. 당시 벤쿠버의 브리티시 컬럼비아대학(UBC)에서 지냈는데, 대학 내 도서관이 크고 많아 그곳에서 본 자료를 참고해 책을 집필했습니다.
<페낭 페라나칸 맨션 - 출처: 통신원 촬영>
페라나칸 문화와 한국 문화의 공통점 또는 다른 특징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 한국 미술이 중국 미술의 영향을 받아 한국화를 시켰다면, 페라나칸 미술도 중국의 것을 받아들여 현지화를 꾀했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한국과 페라나칸 미술에는 중국 불교와 도교, 유교에서 다루는 충, 효 등의 주제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한국과 페라나칸 미술에는 유교적인 맥락에서 이상화하고 숭상했던 용, 봉황, 기린 등의 상징과 복(福· 행복), 녹(祿·관직에 나가 출세), 수(壽·장수)를 상징하는 3명의 성인 삼성(三星) 등이 공통으로 나타납니다.
<화려한 색을 자랑하는 페라나칸 도자기 - 출처: 통신원 촬영>
하지만 페라나칸은 한국보다 더 개방적이라는 점이 다릅니다. 조선 이후 한국이 폐쇄적이고 보수적인 성격을 보였다면, 페라나칸 문화는 영국, 네덜란드 등의 식민지 경험과 중국 문화가 복합적으로 섞이면서 다양한 요소를 찾아볼 수 있게 됩니다. 예를 들어 양탄자는 서아시아, 영국적인 요소지만, 양탄자에 중국적 특색인 사슴, 기린, 십장생을 새겨놓아 중국이나 아시아에서 쓰지 않는 다른 요소를 섞은 독특한 자신만의 문화를 만드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또한 페라나칸 문화에는 개방성과 창의성을 찾을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페라나칸은 베텔넛(빈랑나무 열매)을 뱉는 단지를 중국에서 가져와 사용했는데, 도자기를 완전히 다른 용도로 사용하는 모습이 페라나칸의 창의성을 보여주는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도자기를 있는 그대로 사용하는 조선과 달리 페라나칸은 부를 뽐내는 사치품으로 사용하거나 다른 용도로 쓰는 문화를 용납하고 추구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한국에서 페라나칸 전시회가 열리는 등 페라나칸 문화를 알리는 행사가 개최된 것과 같이 한국과 말레이시아 간 페라나칸을 주제로 협업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이 있을까요? 한국 문화와 페라나칸 문화는 너무나도 다르기 때문에 공통점을 찾아서 하는 협업보다는 오히려 차이점을 돋보이는 행사를 열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한국의 청화백자와 대조적인 페라나칸의 화려한 도자기를 함께 전시하거나, 페라나칸 맨션 앞에서 케이팝 공연을 하는 등 두 문화의 차이점이 극명하게 드러나는 문화행사를 개최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한류를 통해 페라나칸을 세계에 알릴 수 있고, 한국은 아시아적인 문화와 어울리는, 세계로 가는 한류를 보여줄 수 있게 됩니다. 파리의 에펠탑을 배경으로 케이팝 공연을 펼치는 것도 좋지만, 켁록시와 같은 말레이시아 역사적 건물을 배경으로 미술대회를 개최하거나 한류 공연을 펼쳐 전 세계로 뻗어나가는 한국을 각인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최근에는 어떤 부분에 대해 관심을 갖고 계신지, 앞으로의 향후 계획에 대해 궁금합니다. 지금은 아시아 미술을 전반적으로 다룬 『아시아 미술의 역사』라는 책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냉전시대 아시아의 국가주의, 아시아의 내셔널리즘에 관심을 갖고 있고, 시간적으로 여유가 있다면 아시아가 식민지에서 벗어난 뒤 갖게 된 전체주의적 성격과 이것이 어떻게 아시아의 오늘을 만들었는지, 그리고 어떠한 시각 문화를 만들었는지에 대해 연구할 계획입니다.
마지막으로 독자들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책이 어렵고 내용이 복잡해서 앞부분만 읽다가 도저히 못 읽겠다고 생각하시는 분들이 있을 것 같습니다. 책은 앞에서 순서대로 읽어야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목차를 보고 흥미로운 부분을 먼저 읽어도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페라나칸을 더 내세우고 싶었는데, 아직 페라나칸에 대해 많이 알려져 있지 않아 화교사회에 초점을 맞춰 출판하게 됐습니다. 페라나칸은 워낙 복잡하고 다양하기 때문에 이 책이 페라나칸의 전부라고 생각하지 않아주셨으면 좋겠습니다. 페라나칸은 싱가포르에서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기에 싱가포르의 관점에서 논의됐습니다. 하지만 사실 페라나칸이 먼저 나온 것은 중국 이주민이 가장 많았던 인도네시아와 필리핀이며, 이슬람이 우세한 인도네시아에서는 화인을 탄압하는 분위기로 인해 페라나칸과 그 문화가 부각되지 않는 편입니다. 오히려 화인에 대해 좀 더 자유로운 말레이시아가 페라나칸 이야기를 융통성 있게 접근하기 좋았습니다. 따라서 이러한 전체적인 맥락 속에서 페라나칸을 이해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이 책은 페낭을 이해하는 방법 중 아주 일부분이며, 이밖에도 동남아에는 복잡하고 다양한 사회와 문화가 있다는 것을 알려드리고 싶습니다. 페라나칸은 국가적인 차원보다는 말레이 현지인과 중국 이민자의 혼합이라는 보다 종족적인 문제로 다뤄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중국에서 말레이시아로 이주한 하층민들의 피와 땀, 그리고 계급 문제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중국과 말레이시아라는 국가적 차이가 아닌, 부유층과 빈곤층의 격차, 그리고 이것이 이어진 사회 구조에 대한 이야기가 남아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현상은 1960년대 시골의 많은 여성이 가족들에게 생활비를 보내주려고 서울로 올라와 부잣집 식모, 소위 '공순이'로 불리며 일자리를 잡던 모습과도 연결됩니다. 글을 모르는 이가 많았고, 그들 자신의 텍스트가 없기 때문에 이들이 소외된 것처럼 중국 하층민 페낭 이주 노동자의 목소리도 전달될 수 없었다는 이야기도 함께 전하고 싶습니다.
성명 : 홍성아[한국국제문화교류진흥원 말레이시아/쿠알라룸푸르 통신원] 약력 : 현) Universiti Sains Malaysia 박사과정(Strategic Human Resource Manag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