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을 시작하기 전, 칠레 산티아고에서 생활한 지 2년이 막 넘은 통신원이 가장 놀랐던 에피소드 하나를 소개해 보고자 한다. 비가 내리던 어느 날, 한인 식당과 마트들이 모여있는 빠뜨로나또(Patronato) 지역의 커피숍 ‘꼬뽀 데 끄레마(Copo de crema)’를 지나다가 긴 줄이 늘어서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보통 붐벼도 이 정도로 줄을 길게 서지는 않던 커피숍이기에 무슨 일이 있나 궁금해 안을 들여다봤는데, 여느 때와는 다른 컵홀더를 가지고 나오는 사람들을 볼 수 있었다. 바로 방탄소년단의 앨범 발매를 맞이해 팬클럽이 준비한 컵홀더 이벤트였다. 자신이 좋아하는 아티스트의 앨범 발매를 축하하기 위해 커피숍과 미리 협의하여 컵홀더를 준비하고, 그 아티스트를 좋아하는 팬들은 커피숍에 방문하여 생일을 함께 축하하는 이 모습에 순간 통신원은 서울의 여느 커피숍에 와 있는 기분을 느꼈다. 한류의 바람이 와닿기 힘들 정도로 지리적으로 멀고 문화도 너무나 다른 지구 반대편 이곳 산티아고에서 케이팝을 좋아하는 칠레인들이 한국과 너무나도 비슷한 팬 문화를 형성하고 있다는 것을 느낀, 통신원의 기억에 아직도 강하게 남아있는 에피소드 중 하나다.
<인스타그램에서 컵홀더 증정 이벤트를 홍보하는 모습 - 출처 : 커피위드러브 인스타그램 채널(@coffeewithluv13)>
칠레는 남미에서 가장 높은 인터넷 보급률을 가지고 있으며, 이를 기반으로 한 한류와 케이팝 팬덤 역시 남미 전역에서 손에 꼽힐 정도로 크다. 2018년과 2019년에는 <뮤직뱅크>와 ‘SM TOWN 콘서트’와 같은 대형 케이팝 이벤트가 중남미 국가들 가운데 유일하게 개최되기도 했다. 하지만 한편으로 칠레에서 한국 문화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여전히 '소수 문화'로 취급되기도 한다. 규모가 크지 않은 팬덤이 이렇게 적극적으로 행동할 수 있는 원동력은 무엇일까, 궁금증을 가지고 있던 차에 반가운 논문을 발견했다. 산티아고 세종학당이 있는 센트랄대학교의 최진옥 교수가 한국방송학보에 2020년 5월 12일 게재한 '칠레 한류 팬덤 이해하기 : 따라하기, 함께하기, 그리고 따로하기 전략을 중심으로'라는 제목의 논문은 칠레 내 한류 및 케이팝 팬들의 활동을 통하여 칠레 한류 팬덤의 특성을 분석한 논문이다. 칠레 내 주요 팬클럽 운영자들을 대상으로 포커스 그룹 인터뷰와 장기간 현장 참여를 진행하여 한층 사실성과 현장감을 더했다. 칠레 팬덤의 첫 번째 전략 : 따라 하기 전략 칠레 한류 팬덤의 첫 번째 특성은 한국 내 팬덤을 차용하여 적극적으로 현지화하는 것이다. 이러한 전략은 전 세계의 한류 팬덤 사이에서 자신들도 한류 팬으로 인정받으려는 욕구로 인해 발현되었다는 것이 저자의 설명이다. 통신원 또한 2019년 개최된 SM TOWN 콘서트에 참여하여 대부분의 공식 굿즈(Goods : 응원봉, 캘린더, 인형 등 연예인 관련 상품)가 매진사례를 기록한 것을 확인한 적이 있다. 또한 콘서트 마지막에 응원의 의미로 진행하는 플래카드 이벤트도 한국어로 제작하여 한국에서 개최되는 콘서트와 똑같이 이벤트를 진행한다. '우리도 한국 팬과 같은 한류 팬'임을 확인하는 것이다.
<‘2019 SM TOWN in Santiago’ 콘서트장에 꽉 찬 관중들과 매진된 많은 굿즈들 - 출처 : 통신원 촬영>
칠레 팬클럽의 따라 하기 전략은 지리적 먼 거리라는 한계를 뛰어넘어, 한국에서 열리는 공연 및 문화 현장에서도 확인된다고 한다. 이들은 스타들의 콘서트나 드라마 제작발표회를 축하하고 지지하기 위해서 한국에서 열리는 행사에 직접 쌀 화환을 보내는데, 이는 한국 팬클럽의 축하 방식을 그대로 따라 하는 것이다. 칠레인에게는 매우 낯선 쌀 화환을 보내는 방식까지 따라 하면서, 지구 반대편에서는 자신들도 원조 팬들과 똑같은 열정을 갖고 있음을 보여주려는 행동이라는 것이다. 또한 칠레 팬덤은 자신들이 좋아하는 아티스트의 데뷔일이나 생일을 공공장소에서 축하하는 한국 팬의 행동도 따라한다. 방탄소년단의 칠레 팬클럽인 ‘아미 칠레(ARMY Chile)’는 2018년 6월 방탄소년단 데뷔 5주년을 기념하기 위한 전광판 광고를 산티아고와 서울의 지하철역에 동시에 걸었다. 광고의 메시지는 “우리가 아무리 멀리 떨어져 있어도 사랑은 우리를 하나로 만든다(Aun cuando una gran distancia nos separa, el amor nos hace uno)”였는데, 저자는 이를 '거리적 한계를 뛰어넘는 칠레 팬클럽의 활동을 칠레와 한국에서 동시에 과시하려는 시도'라고 해석한다. 칠레 팬덤의 두 번째 전략 : 함께하기 전략 칠레 한류 팬덤은 동시에 여러 스타의 팬이 되거나 다른 스타의 팬클럽 활동에도 참여하는 '멀티팬덤(multifandom)'의 특성을 보인다고 한다. 칠레 한류 팬들은 한국 팬들과 달리 칠레에서 직접 자신들이 좋아하는 아티스트를 만날 기회가 매우 적다. 이러한 여건에서 칠레 한류 팬들은 칠레에서 열리는 다른 케이팝 아이돌의 콘서트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다른 케이팝 아이돌의 기념일 모금에 동참하기도 한다. 이는 칠레에서 한류를 지속가능하게 하는 주요한 동력이라고 저자는 설명한다. 자신에게 1순위 아이돌이 있으면서 다른 아이돌의 팬이 되는 것은 이들에게 '배신'이 아니라, 콘서트나 팬 미팅이 자주 열리기 어려운 지리적인 현실 속에서 케이팝을 향유하기 위한 나름의 전략이라는 것이다. 통신원이 가장 흥미롭게 본 전략은 바로 두 번째, ‘함께하기 전략’이었다. 한국에서는 한 팬덤에 충성하는 것이 일종의 암묵적인 규칙으로 여겨지고, 멀티팬덤을 가지는 것이 비난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하지만 칠레는 지리적으로 너무나 먼 위치에 있기에, '케이팝 가수 중 누구라도 이곳 칠레에서 공연할 기회를 가지게 되면 결국 내 가수가 올 기회도 많아진다'는 윈윈의 사고방식을 가지고 팬덤을 대하는 것이 통신원에게는 너무나 신기하게 느껴졌다. 원격성을 극복하기 위한 칠레 팬들의 함께하기 전략은 케이팝을 향유하는 팬덤끼리 가지고 있는 연대의식과도 맞닿아 있는 것 같았다. 칠레 팬덤의 세 번째 전략 : 따로 하기 전략 칠레 팬들의 첫번째 전략인 따라하기 전략과 궤를 달리하는 따로 하기 전략은, 중남미 한류 팬들끼리 자신들만의 '라틴 팬덤'이라는 집단적 정체성을 구성한다는 것이다. 칠레와 중남미 팬들은 한국의 한류 팬들과 달리 스타들의 사생활에 민감하지 않다고 한다. 어떤 스타가 공개 연애를 하면 자신이 좋아하는 스타에게 애인이 생겼다며 함께 축하하고 기뻐한다고 하는데, 이는 한국의 한류 팬들이 스타의 사생활에 과민하게 반응하거나 스타들이 연애한다고 일종의 배신감을 토로하는 태도와 대치되는 것이다. 이처럼 칠레 팬덤은 스타에 대한 소유욕이나 독점적인 관계를 요청하기보다, 유연하고 느슨한 연대의 방식으로 팬덤을 실천한다는 것이 저자의 설명이다. 논문에서 가장 흥미로웠던 점은 칠레의 케이팝 팬들이 한국 팬들과 같은 보편성을 보임과 동시에 그들만의 특수성 또한 가진다는 것이었다. 칠레 팬덤은 자신들이 좋아하는 아티스트를 대하는 데 있어 '한국 팬들처럼' 하고자 하는 마음과, '그럼에도 우리는 남미 팬덤'이라는 마음이 공존하는 것 같았다. 칠레 팬덤에 대한 논문을 소개할 수 있다는 것은 그만큼 칠레에 뿌리내린 한류 팬덤의 문화가 더욱 넓고 깊어졌다는 의미인 것 같아 내심 뿌듯한 마음이기도 했다. 앞으로도 칠레, 또 중남미의 한류 팬덤에 대한 연구가 많아져 팬덤을 바라볼 수 있는 사람들의 시각도 더 다양해질 수 있기를 바라본다.
※ 참고 자료 최진옥·조영한(2020). 칠레 한류 팬덤 이해하기. <한국방송학보> 제 34권 3호. URL: https://www.kci.go.kr/kciportal/ci/sereArticleSearch/ciSereArtiView.kci?sereArticleSearchBean.artiId=ART002593540&fbclid=IwAR01rmUT0Fc9EPrcbZI07uxnjge6Wf3C8fIGHu70qye2PiNrFW0Mc-gHby0
성명 : 이희원[한국국제문화교류진흥원 칠레/산티아고 통신원] 약력 : 전) 로엔엔터테인먼트(카카오M) 멜론전략팀 매니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