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집트에서 라마단은 종교적 율법을 지키는 것을 넘어 사회적 문화적 의미가 있는 특별한 시기다. 2025년 라마단은 3월 1일부터 시작돼 한 달간 이어진다. 라마단이 되면 사람들은 가난한 이웃을 돕기 위한 식료품을 담은 라마단 백을 나누거나 라마단 식사를 베풀기도 하고, 평소보다 더욱 가족과 친지들과 함께하는 시간을 중요하게 여긴다. 해가 지고 금식을 깨는 기도를 하고 나면 '이프타르(Iftar)'라고 하는 식사를 가족들과 함께하며 TV 앞에 모여 앉는 모습이 마치 의식과도 같은 사회적 풍경이다. 이프타르 시간대에 방영되는 몰래카메라 형식의 코미디 프로그램은 오랜 시간 사랑받아 온 대표적인 콘텐츠다. 가장 유명한 프로그램은 라메즈 갈랄이 진행하는 프로그램인데 올해는 <라메즈 엘론 이집트(Ramez Elon Egypt)>라는 프로그램을 선보이며 여전히 많은 화제를 모으고 있다. 이 프로그램에서는 유명 연예인들이 게스트로 출연해 예상치 못한 상황에 놓이거나 과장된 설정에 놀라는 모습이 주요 재미 요소다. 특히 프로그램의 말미에는 시청자를 대상으로 한 퀴즈 코너가 진행된다. 해당 회차의 내용과 관련된 문제를 문자 메시지로 보내 정답을 맞힌 사람들 중 매일 세 명이 추첨을 통해 10만 파운드(약 300만 원 상당)의 상금을 받는 이벤트가 마련돼 시청자들의 큰 관심을 끌고 있다.
< '라메즈 엘론 이집트(Ramez Elon Egypt)' 포스터 - 출처: 'elcinema' >
라마단은 이집트의 드라마 시장에서도 가장 중요한 시즌이다. 주요 방송사들은 이 시기에 맞춰 간판 드라마를 내놓기 위해 대규모 제작에 나선다. 연기파 배우들이 대거 투입되고 방영되는 드라마들은 이집트를 넘어 사우디아라비아, 아랍에미리트, 요르단 등 중동 전역에서 인기를 끈다. 이집트 드라마나 영화는 오랜 기간 코미디가 강세였는데 최근 장르적 다양화라는 새로운 흐름이 보인다. 또한 전통적으로 가족과 공동체의 가치를 강조하는 주제, 혹은 도덕적 가치를 담는 주제가 흔하게 보인다. 이는 사회연대라는 라마단의 정신과 자연스럽게 맞물리며 매해 반복되는 인기 공식이기도 했다. 최근 주목할 점은 초자연적 요소와 판타지의 등장이다. 이집트 드라마에서 악령, 귀신, 미스터리한 존재들이 등장하는 오컬트 장르는 과거 라마단 시즌에서는 보기 드문 장르였으나 최근 들어 급격히 인기를 얻고 있다. 이집트 드라마에서 초자연적 요소는 단순한 공포물이 아니라 신념과 도덕적 가치에 대한 고민을 담는 서사적 장치로 활용된다. 예를 들어 <알 맛드하(Al-Maddah)> 시즌 5는 악령과의 싸움을 통해 인간의 내면적 갈등과 믿음의 중요성을 강조한 작품이다. 또 다른 화제작인 <더 캡틴(The Captain)>은 코미디 장르로 비행기 사고에서 살아남은 주인공이 죽은 자들의 영혼과 교감하며 과거의 잘못과 용서를 받아들이는 과정을 그려냈다.
< '알 맛드하(Al-Maddah)'와 '더 캡틴(The Captain)' 포스터 - 출처: 'elcinema' >
초자연적 요소는 단순한 판타지를 넘어 선과 악, 죄와 용서, 신념과 선택이라는 깊이 있는 주제를 담아내며 시청자들의 공감을 끌어낸다. 특히 이슬람 문화권에서는 운명론적 사상, 신의 존재와 같은 개념이 일상에 자연스럽게 스며들어 있어 이러한 세계관이 드라마에 반영될 때 신비롭고 흥미로운 요소로 받아들여진다. 라마단 시즌에는 드라마만큼이나 광고 시장도 활발해진다. 높은 시청률을 고려해 기업들은 특별한 광고를 제작하는데 특히 통신사 광고, 식료품 광고가 두드러진다. 라마단 기간 동안 사람들은 가족과 친지들과의 연락을 더욱 자주 하고 음식 소비도 더 많기 때문이다. 라마단 광고를 위해 특별 제작된 광고 음악이 국가적으로 큰 인기를 얻기도 하고 한편의 드라마와 같은 광고가 제작되는 등 라마단 광고는 이집트 대중문화의 또 다른 중심으로 자리 잡았다. 이집트 사람들은 드라마뿐만 아니라 광고를 보기 위해서도 TV 앞에 앉는다고 한다. 또 흥미로운 점은 최근 들어 한국 드라마가 라마단 시즌에 가족들과 함께 시청되는 경우가 늘고 있다는 것이다. 한국 드라마가 유행하던 초기에는 10대~20대 여성들이 혼자 혹은 친구들과 시청하는 일이 많았는데 지금은 가족들과 함께 TV 앞에 모여 한국 드라마를 시청하는 가정이 많아졌다고 한다. 섬세한 감정선과 탄탄한 스토리로 한국 드라마는 이집트 가정에 자연스럽게 스며들며 부모 세대와 자녀 세대가 함께 공감할 수 있는 콘텐츠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이 시간들을 통해 한국문화에 대한 세대 수직적인 전파도 많이 일어나고 있다. 중동에서 한국 드라마의 인기 요인으로 경로사상과 가족 중심 문화 등을 꼽는 이들이 많다. 특히 가족과 사회적 연대라는 라마단 기간의 문화적 특성을 고려했을 때 한국 드라마는 온 가족이 함께 시청할 수 있는 콘텐츠라는 점에서 강점을 가진다. 현재 이집트 넷플릭스에서 <폭삭 속았수다>가 공개 직후 4위에 진입하며 큰 관심을 끌고 있는 점도 라마단 정서와 잘 맞아떨어졌다고 볼 수 있다. 라마단 시즌에 문화적 공감대와 정서가 담긴 한국 드라마가 현지 드라마와 더불어 더욱 사랑받는 콘텐츠로 자리매김하길 기대한다.
사진출처 - 엘시네마 홈페이지, https://elcinema.com/
성명 : 손은옥[한국국제문화교류진흥원 이집트/카이로 통신원] 약력 : ANE(Artist Network of Egypt) 대표, 한국문화공간 The NAMU 운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