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이 찾아온 5월 말, 밴쿠버 그랜빌 아일랜드(Granville Island)에는 세계 각지의 예술가들이 모여들었다. 1970년대 시작돼 올해로 49주년을 맞은 밴쿠버 국제 어린이 페스티벌(Vancouver International Children’s Festival)에서는 온 가족이 함께 즐길 수 있는 연극, 무용, 음악, 서커스, 미디어 아트, 시각 예술 등 다양한 프로그램이 펼쳐졌다. 특히 축제 예술감독이자 집행위원장인 캐서린 캐롤(Katharine Carol)이 개막 인사에서 올해 한국 작품에 주목했다고 밝히며 한국 공연 두 편이 나란히 무대에 오른 점을 소개했다. 브러쉬씨어터(BRUSH Theatre)의 <두들팝(Doodle POP)>과 한국의 예술무대산과 보카델루포(Boca del Lupo)가 공동 제작한 <미 앤드 더 포레스트(Me & The Forest>가 그 주인공이다. 한국 공연예술이 낯선 캐나다 어린이들과 어떻게 소통했는지 각 관계자들과의 화상 인터뷰를 통해 들어봤다.
< 지난 5월 말 밴쿠버에서 열린 밴쿠버 어린이 국제페스티벌 - 출처: 밴쿠버 국제 어린이 페스티벌 홈페이지 >
< '두들팝(Doodle POP)' 공연 후 진행된 Q&A 시간 모습 - 출처: 브러쉬씨어터(BRUSH Theatre) 제공 >
이번 축제 개막 공연으로 선정된 <두들팝>은 이미 한국을 비롯해 세계 여러 나라에서 사랑받아 온 작품이다. 거대한 화이트보드 벽에 배우들이 직접 그림을 그리고 지우면 드럼과 피아노의 라이브 음악, 영상 애니메이션이 결합되며 무대가 완성된다. 그렇게 탄생한 그림들은 눈앞에서 살아 움직이며 어린이 관객들과 만난다.
정현기 배우는 공연의 출발점이 단순한 질문이었다고 말했다. "아이들이 좋아하는 게 뭘까 고민하다가 '낙서'에서 시작했어요. 그 낙서와 같은 그림이 영상 속에서 갑자기 살아 움직이고, 그 영상이 실제 무대와 결합해 현실처럼 펼쳐지는 모습을 공연으로 담으려 노력했습니다."
아이들에게 낙서는 상상력을 표현하는 언어라는 점에 주목한 <두들팝>은 이를 무대예술로 확장해 밴쿠버 관객들과 만났다. 리허설 기간에도 세계 각지 예술단체 관계자들의 질문이 이어졌으며 공연 후 Q&A 시간에는 아이들의 직관적이고 솔직한 질문이 쏟아졌다. 특히 작품의 내용을 깊이 이해한 한 어린이가 “떠나간 거북이는 어디로 간 거예요?”라고 묻자 출연진에게 큰 감동을 안겼다. <두들팝>은 한국어나 한국적 소재 대신 드로잉과 음악, 몸짓, 애니메이션이라는 보편적 감각 언어를 활용해 세계 어린이들과 소통하고 있다. 출연 배우이자 실무를 맡고 있는 정현기 대리는 "케이팝만큼이나 한국 연극과 공연예술도 세계에 알려지기를 바란다"라고 말했다. <두들팝>은 이번 투어에 이어 크로아티아 국제 어린이 페스티벌에 참가한 뒤 내년 뉴욕 브로드웨이 진출도 준비하고 있다.
< 공연 '미 앤드 더 포레스트(Me & The Forest)'에 등장하는 나무 인형의 모습 - 출처: 밴쿠버 국제 어린이 페스티벌 홈페이지 >
< 공연 '미 앤드 더 포레스트(Me & The Forest)'에 등장하는 나무 인형의 모습 - 출처: 밴쿠버 국제 어린이 페스티벌 홈페이지 >
<두들팝>이 보편적인 감각 언어로 객석을 사로잡았다면, 그랜빌 아일랜드 야외극장에서는 또 다른 방식의 공연이 관객들을 만났다. 한국의 '예술무대산'과 캐나다의 '보카델루포(Boca del Lupo)'가 3년간의 준비 끝에 선보인 공동 제작극 〈미 앤드 더 포레스트(Me & The Forest, 나와 숲)〉다. 작품은 '자연이 인간과 소통할 수 있다면 어떨까'라는 상상력에서 출발했다. 관객들은 헤드폰을 착용한 채 숲속을 거닐며 오래된 나무가 건네는 언어와 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예술무대산의 유지연 디자이너는 이 작품의 예술적 모티브가 2024년 캐나다 워크숍에서 시작됐다고 설명했다. "죽은 나무가 또 다른 생명을 태어나게 하고 삶의 원천이 되어 준다는 ‘널스 로그(Nurse Log)’ 개념이 저에게 굉장히 깊게 다가왔어요. 삶의 순환, 죽음의 공존이라는 주제가 작품의 중요한 모티브가 됐습니다." 캐나다와 한국 극단의 역할 분담에서도 양국의 강점이 드러났다. 한국 측은 인형 디자인과 제작, 섬세한 움직임을 담당했고 캐나다 측은 대본과 사운드 디자인, 기술 시스템 구축을 맡았다. 유 디자이너는 “5m 크기의 거대 인형을 조종할 수 있을 만큼 가볍게 만들면서도 나무의 질감을 살리고 섬세한 감정 표현이 가능하도록 하는 것이 가장 큰 기술적 도전이었다”고 말했다. 이번 프로젝트의 총괄을 맡은 조현산 대표는 “일회성 교류를 넘어 지속 가능한 협력 모델을 구축했다는 점에 큰 의미가 있다"며 "처음부터 아시아 공연에는 한국 배우가, 북미와 유럽 공연에는 현지 배우가 참여할 수 있도록 시스템을 설계했고 이를 위해 캐나다 배우들이 한국을 찾아 함께 훈련하는 과정도 거쳤다”고 설명했다.
그동안 캐나다 내 한국 문화는 주로 케이팝, 한국 드라마, 한국 음식을 중심으로 확산돼 왔다. 하지만 이번 밴쿠버 국제 어린이 페스티벌은 그 지평이 아동·가족 공연과 인형극, 비언어극(논버벌) 등 순수 공연예술 분야로까지 넓어지고 있음을 보여줬다. <두들팝>은 언어를 초월한 상상력으로 세계 어린이 관객들과 직접 소통했고, <미 앤드 더 포레스트>는 캐나다의 자연환경과 한국의 인형극 기술을 결합해 새로운 협업모델을 제시했다. 이번 축제는 한국 공연예술의 해외 진출 가능성과 함께 캐나다와의 문화교류가 보다 다양한 예술 분야로 확장되고 있음을 보여준 사례로 평가된다.
사진출처 및 참고자료
- 밴쿠버 국제 어린이 페스티벌 홈페이지, https://www.childrensfestival.ca/about/
- 브러쉬씨어터(BRUSH Theatre)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