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영박물관을 채운 ‘코리아(KOREA)’...이건희 컬렉션, 런던에서 한국 미술 2000년을 펼치다
- 해가 진 런던의 밤, 한국의 고대 유물부터 현대미술까지...현지 관객 발길 이어져 -
해가 진 9월 28일 저녁, 런던(London) 영국박물관으로 들어서자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큼지막한 ‘코리아(KOREA)’라는 글자였다. 박물관 입구에 세워진 대형 홍보판이 오프닝 행사를 찾은 관객들을 맞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세계적인 박물관의 상징적인 공간 한가운데 한국을 알리는 이름이 선명하게 떠 있는 것은 반가운 일이었다. 박물관 안으로 들어가자 이 특별한 전시회 오프닝의 분위기가 더욱 실감 났다. 영국박물관 입구에서 바로 이어지는 넓은 로비는 은은한 연두색과 푸른색 조명이 공간을 감싸고 있었고, 리셉션 행사를 위한 테이블 사이사이로 전시 오프닝을 찾은 사람들로 가득했다. 리셉션 공간 곳곳에는 ‘코리아(KOREA)’가 적힌 전시 포스터도 걸려 있었다. 이날 오프닝 리셉션에는 전시를 축하하기 위해 정치와 문화, 예술, 교육 등 영국 현지의 다양한 분야에서 온 사람들로 가득 찼다. 서로 인사를 나누며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들 사이로 첫 전시를 기대하는 관객들의 모습도 눈에 띄었다. 한국 미술을 주제로 영국박물관에서 열리는 대규모 전시의 시작을 앞둔 뜻깊은 저녁이었다.

런던 한복판에 울려 퍼진 한국 미술 이야기 오프닝 행사는 니컬러스 컬리넌 영국박물관장의 환영 인사로 시작됐다. 컬리넌 관장은 한국 미술이 오랜 시간에 걸쳐 발전해 온 흐름을 언급하며 런던에서 이번 전시를 선보이게 된 것을 환영하고, 전시를 가능하게 한 삼성과 아시아 큐레이터를 비롯한 관계자들에게 감사의 뜻을 전했다. 이어 유홍준 국립중앙박물관장이 연단에 올랐다. 이번 전시를 위해 한국에서 직접 런던을 찾은 유 관장은 전시가 갖는 특별한 의미와 함께 한국 예술의 오랜 역사와 그 안에 담긴 문화적 의미를 소개했다. 김흥종 주영한국대사의 따뜻한 축사도 이어졌다. 인사말이 끝날 때마다 로비에 모인 사람들 사이에서는 큰 박수가 터져 나왔다. 전시의 시작을 축하하는 환영의 박수 속에서 영국박물관이라는 상징적인 공간에 한국 미술을 선보이는 순간의 의미가 더욱 선명하게 다가온 순간이었다.

오프닝 행사가 끝나자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계단을 올라 전시실로 향했다. 전시실 앞에는 이미 긴 줄이 늘어서 있었다. 오프닝 행사에 초청받은 사람들이 한꺼번에 몰린 시간이기도 했지만, 한국 미술 2000년을 한자리에서 만날 수 있다는 기대감이 현장 곳곳에서 느껴졌다. 이번 전시의 정식 개막일은 10월 1일이다. <한국: 2000년 창의의 여정(Korea: 2,000 years of creativity)>은 고(故)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 유족이 2021년 국가에 기증한 소장품을 중심으로 국립중앙박물관과 국립현대미술관, 영국박물관이 함께 마련했다. 앞서 워싱턴DC와 시카고에 이어 해외 순회전의 마지막 장소로 런던을 찾았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품 164점과 국립현대미술관 소장품 15점, 영국박물관 소장품 등을 포함해 총 100건이 전시에 나온다. 국보 10건과 보물 13건도 포함됐다. 전시는 초기 철기시대부터 통일신라, 고려, 조선, 근현대에 이르는 한국의 미술 작품과 유물을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보여주고 있었다. 고대 금속공예와 불교미술에서 고려청자, 조선시대 회화와 현대미술에 이르기까지 한국 미술의 변화와 지속을 한 공간에서 살펴볼 수 있도록 구성됐다. 체계적으로 짜여진 전시 흐름과 구성 덕분인지 현장에서 전시를 둘러보는 동안 무엇보다 인상적인 것은 시대와 장르를 가로지르는 작품의 폭이었다. 호랑이와 일월오악도부터 인왕제색도까지 깨끗한 흰색 배경의 전시실에 들어서자 수많은 한국의 유물과 예술 작품이 한눈에 들어왔다. 현지 관람객들은 작품 앞을 그냥 지나치지 않았다. 작품 하나를 보고 다시 설명문을 읽거나 가까이 다가가 작품의 세부를 꼼꼼히 살펴보고 휴대전화로 사진을 남기는 모습이 곳곳에서 이어졌다. 전시 중간에 위치한 호작도와 일월오악도 주변에는 관람객들이 많이 모여 있었다. 이 두 작품은 전 세계적으로 한국 문화에 대한 관심을 끌어올린 넷플릭스 애니메이션 <케이팝 데몬 헌터스>를 통해 더욱 많은 사람들에게 각인됐다. 특히 강렬한 색채가 시선을 붙잡는 일월오악도 앞에서는 작품을 한동안 바라보는 관람객들이 눈에 띄었다. 그림 속에 배치된 해와 달, 다섯 봉우리의 구성이 만들어내는 압도적인 장면을 카메라에 담으려는 사람들도 있었다.


커다란 범종 역시 관람객들의 발길을 사로잡았다. 유리관 가까이 다가가 표면을 들여다보거나 작품 설명을 꼼꼼하게 읽는 사람들이 이어졌다. 거대한 크기뿐 아니라 오랜 시간을 견뎌온 유물이라는 사실 자체가 관람객들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듯했다. 전시실을 따라 걷다 별도로 마련된 공간으로 들어서자 겸재 정선의 <인왕제색도>가 모습을 드러냈다. 1751년 그려진 이 작품은 비가 갠 뒤의 인왕산을 먹으로 표현한 조선시대 산수화다. 짙은 산의 형태와 번진 듯한 나무의 표현이 만들어내는 풍경 앞에서도 관람객들은 걸음을 늦췄다. 영국 현지에서도 이 작품에 대한 관심은 상당했다. 영국 일간지 ≪가디언(Guardian)≫의 미술평론가 조너선 존스는 전시 리뷰에서 <인왕제색도>를 한국 풍경에 가장 강렬하게 응답하는 작품 가운데 하나로 언급하며, 자연을 이상화하기보다 즉흥적이고 생생하게 포착한 작품으로 평가했다.
전시의 후반부로 갈수록 한국 미술의 시간은 빠르게 현대를 향해 이동했다. 가장 먼저 사람들의 시선을 끄는 건 비디오아트의 선구자 백남준의 작품이었다. 특히 그의 1993년작 비디오 조각 <브람스>는 악기와 영상 장치를 결합해 음악과 전자기술, 시각예술이 만나는 지점을 보여준다. 이날 전시에서 실제로 본 해당 작품은 영상과 악기가 자유롭게 조합돼 흥미로움을 자아냈다. 김인승의 1965년작 <붉은 원피스의 여인>도 눈에 띄었다. 이렇게 전통적인 한국 미술의 이미지에서 출발한 전시가 현대적인 인물화와 영상, 조각으로 이어지면서 한국 미술이 시대의 변화 속에서 어떻게 새로운 표현을 찾아왔는지를 알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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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현지 매체 역시 이러한 시간의 흐름에 주목했다. ≪더 스탠더드(The Standard)≫는 이번 전시를 2000년 이상의 역사를 가로지르는 전시로 소개하면서, 고대의 금속공예와 불교미술, 고려청자와 조선시대 달항아리에서 근현대 미술로 이어지는 흐름을 조명했다. 특히 한국의 오랜 창작 전통을 오늘날 세계적으로 알려진 케이팝과 연결해 바라봤다. 반면 ≪가디언≫은 전시의 고대와 조선시대 작품에서 강한 아름다움을 발견하면서도 20세기 한국사로 넘어가는 과정이 다소 급격하다는 점을 지적했다.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 등 격변의 역사를 작품과 충분히 연결하지 못한 점은 아쉬웠지만, 정선의 <인왕제색도>와 일부 근현대 작품이 남기는 정서적 울림은 컸다고 평가했다. 그러나 현지 언론들이 이날 오프닝 행사를 앞다퉈 보도한 것은 이번 전시가 영국 현지 문화면에서 상당한 관심을 받고 있다는 점을 보여준다. 영국박물관이 한국 미술을 2000년이라는 긴 시간의 흐름 속에서 소개했다는 사실 자체가 영국 관객들에게 새로운 관람 경험을 제공하고 있는 것이다. 작품을 넘어 일상으로 이어진 ‘코리아(KOREA)’ 고대와 현대미술까지 모두 지나 전시의 마지막 공간으로 향하자 다양한 작품을 활용한 문화상품이 전시된 공간이 나타났다. 한국에서 이미 큰 인기를 끌고 있는 국립박물관문화재단의 문화상품 브랜드 ‘뮷즈(MU:DS)’가 선보이는 상품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일월오악도와 호작도 등 전시에서 만난 이미지가 생활용품과 기념품으로 다시 등장했다. 작품을 감상한 관람객들이 상품을 하나씩 살펴보며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도 눈에 들어왔다. 미술관이나 박물관에서 전시를 본 뒤 작품의 이미지를 기념품으로 간직하는 일은 익숙하지만, 이날 공간에서는 그 연결이 더욱 흥미롭게 느껴졌다.

이번 전시는 그 자체로 영국박물관과 한국 미술의 오랜 교류가 한 단계 확장된 결과이기도 하다. 영국박물관은 1984년 <한국미술 오천년> 특별전을 개최한 이후 한국미술에 지속적으로 관심을 보여왔으며, 2000년부터 국립중앙박물관 소장품을 대여해 한국실을 활성화해 왔다. 이번 전시에서는 한국 기관의 소장품뿐 아니라 영국박물관이 소장한 한국 유물과 최근 수집한 현대미술 작품도 함께 선보인다. 오프닝 행사가 열린 이날 밤, 영국박물관 안에서 마주한 풍경은 단순히 한 전시의 개막을 알리는 자리에만 머물지 않았다. 입구에서부터 관람객을 맞이한 ‘코리아(KOREA)’라는 글자, 로비를 가득 채운 사람들, 전시실 앞에 길게 이어진 줄, 작품 앞에서 한참 동안 발걸음을 멈춘 관람객들의 모습은 한국 문화 유산과 예술 작품에 대한 현지의 뜨거운 관심을 반영한다. 영국 런던 한복판 영국박물관 안에 펼쳐진 한국 2000년의 시간은 앞으로 더욱 많은 현지 관람객들을 만날 예정이다.
사진 출처 및 참고자료 - 통신원 촬영 - 영국박물관(British Museum) 공식 웹사이트, https://buly.kr/7mEWsZg - ≪가디언(Guardian)≫ (2026. 09. 28). Korea review – a nirvana of wild beauty shattered by the 20th century, https://www.theguardian.com/artanddesign/2026/sep/28/korea-review-british-museum-london - ≪더 스탠더드(The Standard)≫ (2026. 09. 28). Korea at the British Museum: A dazzling, soulful trip through the history of nation, https://www.standard.co.uk/culture/exhibitions/korea-at-the-british-museum-review-b1298646.html - 국립중앙박물관 공식 웹사이트, https://www.museum.go.kr/MUSEUM/contents/M0701040000.do?schM=view&catCustomType=post&catId=93&arcId=23990&cp=1&sv=