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워서 펼치는 상상력의 무대… 하땅세 <고래바위에서 기다려>, 시드니 관객과 만나다
- 시드니 오페라하우스 호주 초연… 실시간 영상과 '누극'으로 전한 기다림·상실·상상력 -
한국 창작극이 시드니 오페라 하우스에서 호주 어린이와 가족 관객들을 만났다. 극단 하땅세의 <고래바위에서 기다려(Waiting!)>가 지난 9월 30일부터 10월 2일까지 시드니 오페라 하우스 스튜디오(Studio)에서 호주 초연으로 선보였다. 이번 공연은 시드니 오페라 하우스의 어린이·가족 축제 <와일드 싱스(Wild Things)> 프로그램의 하나로 마련됐다. 약 50분간 진행된 이 작품은 3세 이상 관객을 대상으로 하며, 한국어와 영어, 배우들의 움직임, 실시간 카메라 영상과 프로젝션을 결합해 독특한 시각적 이야기를 펼쳐 나갔다. <고래바위에서 기다려>는 어부인 아버지와 다시 만나기를 기다리는 주인공 '바다'가 고래에게 삼켜지면서 시작되는 환상적인 여정을 그린다. 고래 배 속에서 새로운 친구들을 만나며 펼쳐지는 모험을 통해 기다림과 상실, 그리고 이를 받아들이는 힘을 어린이의 시선으로 풀어낸다. 이 작품은 2024년 국제아동청소년연극협회(ASSITEJ) 서울 어린이 연극 무대에서 대상과 연출상을 수상, 그 작품성을 인정받았다. 이번 호주 초연은 문화체육관광부가 주최하고, 한국국제문화교류진흥원이 주관하는 '케이-아츠 온더고(K-arts on the GO)’의 지원을 통해 마련됐다. 공연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배우들이 무대 바닥에 누운 채 연기하는 독특한 방식이다. 무대 위 배우들의 움직임을 카메라가 위에서 실시간으로 촬영해 스크린에 투영하면, 객석에서는 배우들이 바닷속을 헤엄치거나 고래와 함께 환상의 세계를 여행하는 듯한 장면으로 확장된다. 하땅세는 이를 극단만의 '누극', 즉 누워서 하는 연극으로 발전시켜 왔다. 윤시중 연출은 한 작품이 일회성 공연에 그치지 않고 지속적인 레퍼토리로 남기 위해서는 다른 작품으로 쉽게 대체할 수 없는 독창성이 필요했다고 설명했다. 그는 "몇 년이 지나더라도 저 공연은 다른 공연으로 대체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게 하고 싶었다"라며 여러 표현 방식을 실험한 끝에 배우가 누운 채 연기하고 이를 영상으로 보여주는 현재의 형식을 만들게 됐다고 말했다. 작품은 한 번 완성된 형태에 머물지 않았다. 약 5년에 걸쳐 배우 구성과 장면, 관객과 소통하는 방식이 계속 변화했다. 초기에는 8명의 배우가 참여했지만, 현재는 세 명의 배우를 중심으로 재구성됐으며, 공연하는 공간과 관객의 반응에 따라 새로운 아이디어가 더해진다.
하땅세는 "공간에 맞춰 그 공간에서 답을 찾고, 진행하면서 계속 진화하고 업그레이드된다"라고 설명했다. 같은 작품이라도 공연장과 관객의 반응에 따라 완전히 같은 공연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유연성은 시드니 공연에서도 자연스럽게 드러났다. 학교 방학을 맞아 공연장을 찾은 아이들과 가족 단위 관객들은 배우들의 움직임과 실시간 영상에 자연스럽게 반응하며 작품에 함께 몰입했다. 어린 관객들은 무대 위 상황에 말을 건네거나 배우의 질문에 즉각적으로 답했고, 이러한 반응은 배우와 객석 사이의 거리를 좁혔다. 공연이 끝난 뒤, 이어진 질의응답에서도 아이들의 호기심은 계속됐다. "왜 무대에 배우가 세 명뿐인가", "공연을 만드는 데 얼마나 걸렸나", "왜 한국어는 일부만 사용했나", "왜 제목이 '고래바위에서 기다려(Waiting!)'인가" 등, 줄거리뿐 아니라 작품의 형식과 제작 과정에 관한 질문이 이어졌다. 제작진은 작품이 약 5년에 걸쳐 발전해 왔으며, 더 많은 배우가 출연했던 초기 버전에서 현재는 세 명의 배우가 여러 역할을 소화하는 방식으로 변화했다고 설명했다. 아이들이 무대에서 보이는 결과뿐 아니라 공연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까지 관심을 보였다는 점도 인상적이었다. 언어에 관한 질문도 나왔다. 공연에서는 한국어 표현을 일부 남겨두는 동시에 특정 언어에 얽매이지 않는 '지브리시(Gibberish)'를 활용했다. 최수라 배우는 원래 일부 영상 장면에서 사용했던 지브리시를 공연의 다른 부분으로 확대하면서 장면 사이의 연결이 더욱 자연스러워졌다고 설명했다. 하땅세는 어린이극이라고 해서 메시지나 교훈을 지나치게 설명하는 것도 경계했다. 아이들이 각자의 방식으로 작품을 받아들이도록 여백을 남기는 것이다. 실제 공연에서도 모든 대사를 이해하지 않아도 몸짓과 표정, 영상과 음악을 통해 상황과 감정을 따라갈 수 있었다. 한국적 요소도 자연스럽게 작품 속에 녹아 있었다. 공연에서 한국 어린이들에게 익숙한 동요 <곰 세 마리>가 등장했고, 공연 후 진행된 질의응답(Q&A)에서 "한국어를 할 수 있는 관객이 있는가"를 묻자 여러 명이 손을 들기도 했다. 한 관객은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야구 글러브의 의미까지 질문했다. 작은 소품과 언어까지 세심하게 관찰하는 모습은 어린 관객들이 작품을 수동적으로 바라보는 데 그치지 않고, 각자의 방식으로 해석하고 있음을 보여줬다. 작품의 중심에는 '기다림'과 '상실'이라는 어린이극으로서는 다소 묵직한 감정이 자리한다. 이에 대해 윤시중 연출은 아이들 역시 성장하면서 가족이나 가까운 사람, 혹은 반려동물 등 다양한 존재와의 이별과 상실을 경험하게 된다며, 이를 피하는 것보다는 견뎌낼 수 있는 힘에 주목했다고 설명했다. 그는 '상실을 견디는 힘'이 상상력과 주변의 동료들을 통해 만들어질 수 있다는 생각으로 작품을 만들었다고 말했다. 아버지를 기다리는 한 아이의 이야기에서 출발하지만, 작품은 누구에게나 존재할 수 있는 기다림과 부재, 그리고 이를 받아들이는 과정으로 의미를 확장한다. <고래바위에서 기다려(Waiting!)>라는 제목 역시 이러한 감정과 맞닿아 있다. 공연 후, 한 어린이가 제목의 의미를 묻자 제작진은 작품이 아버지를 기다리는 바다의 여정을 담고 있을 뿐 아니라, 어린이들도 일상에서 다양한 기다림을 경험한다고 설명했다. 지금은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는 감정이라도 성장하면서 기다림의 의미를 새롭게 받아들일 수 있다는 것이다. 극단에게 이번 시드니 오페라 하우스 공연 역시 특별한 경험으로 남았다. 다양한 해외 공연 경험이 있는 극단이지만 윤 연출은 이번 방문에서 공연장 측의 세심한 환대와 현지 관객의 적극적인 반응이 특히 기억에 남는다고 전했다. 윤 연출은 시드니에 도착한 뒤 배우들에게 "잘해야 한다. 다시 와야 한다"라고 이야기했을 정도로 새로운 긴장감을 느꼈다며, 이번 공연을 통해 단순히 다시 호주에 오고 싶다는 생각을 넘어 "더 좋은 작품을 만들고 싶다는 생각이 크게 들었다"라고 말했다.
공연이 끝난 뒤, 직접 다가와 좋았다고 이야기한 어린 관객들의 모습도 기억에 남았다고 했다. 윤 연출은 쑥스러워하면서도 자신의 감상을 전하는 아이들에게서 진심이 느껴졌고, 배우가 말을 건네면 곧바로 객석에서 반응이 돌아오는 호주 관객의 적극적인 분위기 역시 인상적이었다고 전했다. 이번 공연은 한국 공연 예술이 해외 관객과 직접 만나는 의미를 다시 생각하게 하는 자리이기도 했다. 윤 연출은 영화와 온라인 플랫폼, 모바일과 인공지능 등, 콘텐츠를 접하는 방식이 빠르게 변화할수록 오히려 배우와 관객이 같은 공간에서 직접 만나는 극장의 가치가 중요해지고 있다고 봤다. 특히 지브리시와 움직임처럼 언어에 크게 의존하지 않는 표현 방식은 해외 관객과 만날 때 더욱 직접적인 힘을 발휘한다. 그는 해외 무대를 경험하면서 "언어에 대한 장벽이 없어지는 것을 피부로 느낀다"라며 극장에서만 가능한 관객과의 교류를 강조했다. 배우들이 호주 어린이들에게 남기고 싶은 것도 하나의 정답이나 교훈은 아니었다. 최수라 배우는 "정답이 있는 것 같지는 않다"라며 "슬프면 슬픈 대로, 행복하면 행복한 대로, 재미있으면 재미있는 대로 공연 속에서 다양한 감정을 느꼈으면 좋겠다"라고 말했다. 이지연 배우 역시 공연의 경험이 어린 관객들의 기억 속에 오래 남기를 바랐다. 과거 공연을 봤던 어린이가 몇 년 뒤 성장해 같은 작품을 다시 찾았던 경험을 떠올리며, 시간이 흐른 뒤 '기다림'이라는 감정을 다시 떠올렸을 때, 이전과는 또 다른 의미를 발견할 수 있기를 바란다고 전했다. 서로 다른 문화권에서 살아가는 어린이들이 결국 비슷한 감정을 공유하고 있다는 점을 느끼기 바란다는 것이다. 공연 후, 이어진 질문들은 어린 관객들이 <고래바위에서 기다려>를 단순히 '보는 것'에 그치지 않았음을 보여줬다. 세 명의 배우가 어떻게 무대를 채웠는지, 왜 특정한 언어를 선택했는지, 제목에는 어떤 의미가 담겼는지까지 질문하며 작품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하땅세가 '누극'이라고 부르는 <고래바위에서 기다려>는 배우들이 바닥에 누워 있어 오히려 무대의 물리적 한계를 넘어선다. 작은 몸짓은 실시간 카메라를 통과해 바다와 고래, 환상의 세계로 확장되고, 어린 관객들의 웃음과 질문은 다시 무대 위 배우들에게 전달된다. 시드니 오페라 하우스에서 펼쳐진 <고래바위에서 기다려>는 한국 어린이 공연의 독특한 창작 방식을 소개하는 데 그치지 않았다. 언어와 문화가 달라도 기다림과 상실, 즐거움과 슬픔이라는 감정은 서로 통할 수 있으며, 배우와 관객이 같은 공간에서 호흡할 때 하나의 이야기가 또 다른 모습으로 완성될 수 있음을 보여준 무대였다. 본 공연은 한국국제문화교류진흥원 <케이-아츠 온더고(K-arts on the GO)>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www.k-go.or.kr
사진 출처 및 참고자료 - 통신원 촬영 - 시드니오페라하우스 페이스북(@sydneyoperahouse), https://www.facebook.com/sydneyoperahouse , https://www.facebook.com/photo?fbid=1546455247520832&set=pcb.1546455404187483 - Sydney Opera House, Waiting!, https://www.sydneyoperahouse.com/wild-things/wait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