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통신원이 8년째 살고 있는 폰테데라(Pontedera)는 이탈리아 토스카나에 자리한 인구 3만 명의 작은 도시다. 폰테데라는 피사에서 동쪽으로 약 20km, 피렌체에서 서쪽으로 약 50km 떨어진 아르노강 계곡(Valdera)의 중심지로, 지리적으로 토스카나의 주요 도시들을 잇는 교통의 요충지이자 풍부한 산업적·문화적 역사를 지니고 있다. 피렌체에 온 한국 관광객이 당일치기로 피사로 갈 때 타는 기차가 들리는 도시인데, 관광객은 찾지 않지만 나름 주변 도시 중 인구 밀도가 높다.
중세의 성벽과 르네상스의 고풍스러운 건축물들이 늘어선 전형적인 토스카나 관광 도시들과 달리, 폰테데라는 거리에 현대 미술 작품이 자연스럽게 녹아있는 ‘야외 미술관’ 같은 독특한 분위기를 풍긴다. 오래된 벽돌 건물 사이로 세계적인 거장들의 현대 조각품이 당당히 자리 잡고 있으며, 주민들이 매일 오가는 일상적인 광장과 골목은 계절마다 새로운 예술적 서사로 채워진다. 매년 연말이나 시즌마다 예술적 감각이 돋보이는 독특한 거리 조명과 현대 조각품들이 광장 곳곳에 설치되어 현대적인 활력을 불어넣는다. 이는 단순히 도시를 장식하는 차원을 넘어, 폰테데라라는 도시 전체가 살아 움직이는 하나의 거대한 공공미술 플랫폼으로 기능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원래 폰테데라는 전 세계 스쿠터 팬들의 가슴을 뛰게 하는 아이콘, 바로 ‘베스파(Vespa)’를 생산하는 피아조(Piaggio)사의 본사와 주 공장이 있는 곳이다. 1920년대부터 비행기 부품과 철도 차량을 생산하며 이탈리아의 핵심 산업 도시로 성장했던 폰테데라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연합군의 집중 폭격으로 도시 전체가 폐허가 되는 아픔을 겪었다. 그러나 전쟁의 포화 속에서 피아조는 무너진 공장을 재건하고, 1946년 이탈리아 서민들의 발이 되어줄 혁신적인 이동 수단인 베스파를 출시했다. 베스파의 성공은 단순한 상업적 성공을 넘어 폐허가 된 도시를 다시 일으켜 세운 경제 부흥의 등불이었으며, 이탈리아 전역에 활력을 불어넣은 문화적 사건이었다.
< 폰테데라에서 열린 미술전시회 포스터 - 출처: 통신원 촬영 >
이러한 역사적 맥락 속에서 최근 폰테데라의 중심가인 코르소 마테오티(Corso Matteotti)와 팔프(Palazzo Pretorio Pontedera, PALP) 미술관을 중심으로 매우 의미 있는 공공미술 프로젝트와 전시가 열리고 있다. 바로 베스파 탄생 80주년을 앞두고 열린 특별 기획전, ‘베스파를 타는 사람… 베스파 80주년을 위한 80인의 현대 미술가들(Chi Vespa… Ottanta artisti contemporanei per gli 80 anni della Vespa)’이다. 지난 3월 28일부터 6월 14일까지 이어진 이 전시는 폰테데라 중심지의 핵심 문화 공간인 피아차 쿠르타토네(Piazza Curtatone)의 팔프 미술관과 코르소 마테오티 거리 전체를 하나의 거대한 전시장으로 탈바꿈시켰다.
이번 프로젝트는 회화, 조각, 사진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는 80명의 현대 미술가들이 참여하였고, 베스파를 하나의 이미지, 세대의 기억, 신화, 그리고 동시대를 관통하는 아이코닉한 문화적 테마로 다루며 예술적 대화를 시도했다. 베스파 특유의 유려한 우아함을 자랑하는 곡선 프로필, 대담하고 감각적인 컬러 구성, 그리고 공간을 가르는 역동적인 형태 등은 예술가들의 손을 거쳐 해체되고 변형되었으며, 각자의 독창적인 예술적 스타일과 결합하여 새로운 시각적 언어로 재탄생했다.
< 베스파에 영감을 받은 미술 작품 전시로 거리가 미술관이 되었다 - 출처: 통신원 촬영 >
실제로 통신원이 찾은 코르소 마테오티(Corso Matteotti) 거리는 그 자체가 하나의 거대한 입체 캔버스였다. 보행자 전용 도로를 따라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평범한 옷가게 쇼윈도 앞이나 노천카페 테이블 바로 옆에 대담한 원색의 베스파 조각상들이 무심한 듯 당당하게 어우러져 있었다. 특히 강렬한 기하학적 패턴으로 재해석된 실물 크기의 스쿠터 설치작품은 토스카나의 여름 햇살을 반사하며 거리 전체에 눈부신 현대적 에너지를 불어넣고 있었다.
무엇보다 이번 전시의 백미는 예술 작품을 대하는 폰테데라 주민들의 일상적인 태도였다. 장바구니를 들고 가던 한 노부부가 베스파를 모티브로 한 팝아트 작품 앞에 멈춰 서서 한참 동안 자신들의 첫 스쿠터에 대한 기억을 나누는 모습, 유모차를 탄 아이가 알록달록하게 변형된 작품이 신기한 듯 고사리 같은 손으로 만져보며 까르르 웃는 장면은 현장에서만 느낄 수 있는 생생한 감동이었다. 피아차 쿠르타토네 광장 벤치에 앉아 아이스크림을 먹는 청년들의 등 뒤로 거장의 조각품이 자연스러운 배경이 되어주듯, 이곳 시민들은 예술을 억지로 ‘관람’하는 것이 아니라 매일의 삶 속에서 당연하다는 듯 향유하고 있었다.
거리를 가득 채운 작품들을 바라보며 본 통신원은 공공미술이 도시와 공동체에 미치는 영향력을 다시금 실감할 수 있었다. 미술관이라는 높은 문턱을 넘어 주민들이 매일 장을 보고 출퇴근하는 일상의 거리로 걸어 나온 예술 작품들은 도시의 풍경을 바꾸어 놓았다. 박제된 유산이 가득한 관광 도시가 아니라, 매일의 삶 속에서 예술을 소비하고 향유하는 역동적인 삶의 공간이 완성된 것이다.
이탈리아 대중에게 베스파는 단순한 운송 수단 그 이상이다. 그것은 전후 이탈리아의 자유와 해방을 상징하며, 여러 세대에 걸쳐 축적된 집단적 기억의 파편이자, 물리적 공간과 문화적 경계를 넘나드는 역동적 움직임의 상징이다. 예술가들은 바로 이 지점을 포착하여 대중의 기억 속에 잠자고 있던 정서적 유대를 공공미술을 통해 시각적으로 일깨운 것이다.
이탈리아의 수많은 소도시들이 과거의 영광과 중세의 유산에 기대는 반면, 폰테데라는 자신들이 가진 산업적 자산인 베스파와 현대 예술을 결합함으로써 독창적인 도시 재생의 모델을 제시하고 있다. 거리를 장식한 현대적인 조각상들과 시즌마다 새롭게 기획되는 감각적인 조명 시설들은 도시의 정체성을 끊임없이 새로고침하며 활력을 불어넣는다.
공공미술이 지닌 진정한 가치는 이처럼 예술을 삶의 가장 가까운 곳으로 가져와 평범한 공간에 특별한 서사를 부여하고, 공동체의 역사적 정체성을 미래의 문화적 자산으로 승화시키는 데 있다.
사진출처 및 참고자료
- 통신원 촬영
- 《테레 디 피사(Terre di Pisa)》 웹사이트, ‘Mostra al PALP Pontedera: “Chi Vespa… Ottanta artisti contemporanei per gli 80 anni della Vespa”,
https://www.terredipisa.it/events/mostra-al-palp-pontedera-chi-vespa-ottanta-artisti-contemporanei-per-gli-80-anni-della-vesp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