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과 2~3년 전만 해도 뉴욕에서 김밥을 가장 쉽게 만나는 곳은 한식당이 아니라 미국의 식료품점 트레이더 조(Trader Joe's) 냉동식품 코너였다. 2023년 출시된 냉동 김밥은 입고될 때마다 품절을 반복했다. 틱톡 등 소셜미디어서비스에는 "드디어 구했다"는 인증 사진이 이어졌고, 일부 매장에서는 구매 수량을 제한할 정도였다. 한국에서는 너무나 평범한 도시락 메뉴가 미국에서는 가장 구하기 어려운 냉동식품 가운데 하나가 된 것이다. 한 줄에 3.99달러(약 5,700원)인 냉동 김밥을 더 맛있게 먹는 조리법과 레시피까지 소셜미디어서비스에서 공유됐다. 당시 많은 사람들은 이를 '틱톡 열풍' 정도로 여겼다. 하지만 지금 뉴욕을 보면, 그 열풍은 유행으로 끝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 2023년 출시 후 큰 인기를 끌었던 트레이더 조의 냉동 김밥 – 출처: '트레이더 조(Trader Joe's)' >
2024년에는 뉴욕시 공립학교 급식 프로그램 <오늘 도시락에는 무엇이 들어 있나요?(What's in Your Lunchbox?)>에서 한인 소녀 에이버리가 직접 김밥을 만들어 먹는 영상을 공개해 776만 회가 넘는 조회수를 기록했다. 도시락통에서 김과 밥을 꺼낸 에이버리는 책상 위에 호일을 깔고 김밥을 말기 시작한다. 진행자가 "왜 김밥을 좋아하느냐"고 묻자 그는 "건강하고 맛있기 때문"이라고 답한다. 이 영상은 단순한 먹방 콘텐츠가 아니었다. 뉴욕시는 "아이들은 친구들의 도시락을 보며 더 넓은 세상을 배운다"며 기획 의도를 설명했다. 김밥은 더 이상 한국 가정에서만 싸는 도시락이 아니었다. 뉴욕 아이들이 서로의 문화를 배우는 '교실 속 점심'이 되기 시작했다.
< 776만 회가 넘는 조회수를 기록하며 화제를 모은 뉴욕 공립학교 한인 소녀의 김밥 도시락 영상 – 출처: '아시아경제(Asiae)' >
그리고 올해 들어 변화는 한층 더 뚜렷해졌다. 지난 3월 맨해튼 웨스트빌리지에는 김밥만을 내세운 TBD 김밥(TBD Gimbap)이 문을 열었다. 일본 미쉐린 2스타 레스토랑 마사(Masa) 출신이자 핸드롤 전문점 나미노리(Nami Nori) 공동창업자인 셰프 지한 리(Jihan Lee)가 선보인 팝업이다. 매장 입구에는 "간장은 필요 없습니다(No Soy Sauce Required)"라는 문구가 적혀 있다. 김밥을 더 이상 '한국식 스시'로 설명하지 않겠다는 선언이다.
< 뉴욕 웨스트 빌리지에 위치한 티비디(TBD) 김밥 전문점 내부 모습 – 출처: 통신원 촬영 >
최근에는 뉴욕대학교(NYU) 주변인 유니온 스퀘어에 롤오버 김밥(Roll Over Kimbap)도 문을 열었다. 뉴욕대 학생들과 직장인 유동인구가 많은 아스터 플레이스는 샌드위치와 부리토, 샐러드를 사 들고 이동하는 사람들이 끊이지 않는 곳이다. 롤오버 김밥은 바로 그 점심 시장을 겨냥했다. 김밥을 특별한 한식이 아니라 바쁜 뉴요커들이 일상적으로 선택하는 점심 메뉴로 포지셔닝한 것이다. 여기에 한국에서 30년 넘게 사랑받은 킴스 김밥(Kim's Kimbap)도 지난 4월, 미국 1호점을 뉴욕에 열었다.
< 뉴욕 첼시에 오픈한 킴스 김밥 미국 1호점 – 출처: '킴스 김밥 인스타그램(@Kimskimbap)' >
물론 뉴욕의 김밥 전문점이 처음은 아니다. 2014년 문을 연 김밥랩(Kimbap Lab)은 뉴욕에서 김밥만을 전면에 내세운 가장 이른 사례 가운데 하나였다. 맨해튼 미드타운을 중심으로 직장인들을 겨냥해 주문 즉시 만드는 김밥과 덮밥을 선보이며, 김밥을 분식이 아닌 패스트 캐주얼 점심 메뉴로 재해석했다. 불고기, 참치, 채식 김밥뿐 아니라 퀴노아나 현미를 선택할 수 있도록 하는 등 뉴욕 소비자의 취향을 반영한 메뉴를 선보인 것도 특징이다. 당시에는 한식에 익숙한 고객이 대부분이었지만, 지금은 김밥 자체를 찾는 소비자가 늘어나면서 뉴욕의 김밥 시장은 또 다른 성장 국면을 맞고 있다. 예전에는 한국 음식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찾아가는 메뉴였다면, 이제는 김밥 자체를 찾는 소비자들이 생겨난 것이다.
< 2014년 오픈해 브루클린과 맨해튼 2곳에 매장을 운영 중인 김밥랩 – 출처: '김밥랩(Kimbap Lab)' 홈페이지 >
미국 음식 전문 매체 《이터(Eater)》는 최근 이를 두고 '김밥이 다시 자신을 소개할 시간(Let Gimbap Reintroduce Itself)'이라고 표현했다. 기사에 따르면 미국 소비자들은 더 이상 김밥을 '한국식 스시'라는 설명으로 이해하지 않는다. 김밥은 여러 재료가 만들어내는 식감과 균형, 그리고 간편하면서도 든든한 한 끼라는 고유한 매력을 가진 음식으로 받아들여지기 시작했다.
< 지난 7월 뉴욕 유니온 스퀘어에 오픈한 롤오버 김밥 – 출처: '롤오버 김밥(Roll Over Kimbap)' 홈페이지 >
티비디(TBD) 김밥의 창업자, 셰프 지한 리 역시 "김밥은 스시와 다른 음식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고 말한다. 그에게 김밥은 특별한 날 먹는 고급 음식이 아니라 일주일에 두세 번 부담 없이 먹을 수 있는 일상의 식사다.
이 변화는 생각보다 큰 의미를 갖는다. 음식은 유명해졌다고 해서 바로 문화가 되지는 않는다. 누구나 쉽게 사 먹을 수 있고, 점심 메뉴가 되고, 학교 아이들이 자연스럽게 접하게 될 때 비로소 도시의 일상이 된다. 트레이더 조 냉동식품 코너에서 시작된 김밥 열풍은 뉴욕 공립학교의 점심시간 장면으로, 그리고 뉴욕 곳곳에 생겨나는 김밥 전문점으로 이어지고 있다.
< 뉴욕 웨스트 빌리지에 위치한 TBD 김밥 – 출처: 통신원 촬영 >
그래서 지금 뉴욕의 김밥 이야기는 '세계화'보다 더 흥미롭다. 세계화는 언젠가 끝나는 이벤트지만, 일상이 되는 것은 훨씬 오래 남는다. 어쩌면 뉴욕에서 가장 큰 변화는 사람들이 더 이상 김밥을 "한국의 스시"라고 설명하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일지 모른다. 점심시간, 뉴요커들에게 김밥은 더 이상 설명이 필요한 음식이 아니다. "오늘은 김밥 먹을래?" 그 한마디면 충분한 시대가 시작되고 있다.
사진출처 및 참고자료
- 통신원 촬영
- 뉴욕정부 인스타그램 계정(@nycgov), https://www.instagram.com/nycgov/reels/
- 《아시아경제(Asiae)》 (2024. 05. 02). Korean Girl Eating Gimbap at School... Why the New York City Video Became a Late Sensation,
https://www.asiae.co.kr/en/article/2024050210462138749
- 롤오버 김밥(Roll Over Kimbap) 홈페이지, https://www.rolloverkimbap.com/
- 김밥랩(Kimbap Lab) 홈페이지,https://www.kimbaplab.com/
- 킴스 김밥(Kim's Kimbap) 인스타그램 계정(@kimskimbap), https://www.instagram.com/kimskimbap/
- 푸드 칼럼니스트 매트브럭(Mattbruck) 인스타그램 계정(@mattbruck), https://www.instagram.com/mattbruck/reels/
- 트레이더 조(Trader Joe's) 홈페이지, https://www.traderjoes.com/home/products/pdp/kimbap-076023
- 《이터(Eater)》 (2026. 04. 07). Let Gimbap Reintroduce Itself, https://www.eater.com/trends/953869/gimbap-kimbap-korean-dish-explain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