싱가포르의 대형 서점 체인 파퓰러 북스토어(POPULAR Bookstore)의 비소설 베스트셀러 코너에서 한국 작가 댄싱 스네일(Dancing Snail)의 영어 번역서 『게으른 게 아니라 충전 중입니다(I’m Not Lazy, I’m on Energy Saving Mode)』가 9위에 올라 있는 모습이 포착됐다. 케이팝과 한국 드라마, 케이 푸드 중심으로 주목받아 온 한국문화가 이제는 책장 위의 자기계발·힐링 에세이 영역에서도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통신원이 해당 파퓰러 북스토어 지점을 방문한 시간은 평일 낮이었다. 서점 안에는 참고서와 문구류, 아동도서, 소설과 비소설 등 다양한 상품을 살펴보는 고객들이 있었고, 매장 안쪽으로 이동하자 베스트셀러 순위가 표시된 도서들이 한곳에 모여 있는 코너가 눈에 들어왔다. 일반 서가에서는 수많은 책 가운데 제목을 하나씩 찾아야 하지만, 입구에 위치한 베스트셀러 코너는 현재 주목받는 책들의 표지와 순위를 한눈에 볼 수 있도록 구성돼 있어 자연스럽게 시선을 끌었다.
특히 『게으른 게 아니라 충전 중입니다』는 한국문화나 아시아 도서를 따로 소개하는 특별 코너가 아니라 일반 비소설 베스트셀러 코너 안에 놓여 있었다. 책 표지 옆에 표시된 숫자 ‘9’도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었다. 한국 작가의 책이라는 점을 별도로 강조하기보다 다른 영어권 비소설 도서들과 같은 기준으로 진열돼 있다는 점이 인상적이었다. 현지 독자에게 이 책이 ‘한국 관련 상품’이나 팬덤 중심의 문화상품이 아니라 자기계발, 마음 돌봄, 생활 에세이의 하나로 소개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장면이었다.
취재 시간 동안 매장을 찾은 고객들은 순위 코너를 비롯한 여러 서가를 둘러보며 책을 살펴봤다. 다만 통신원이 현장을 관찰한 시간 안에는 특정 고객이 『게으른 게 아니라 충전 중입니다』를 직접 꺼내 읽거나 구매하는 모습, 또는 직원에게 해당 책을 문의하는 장면까지는 확인되지 않았다. 서점 직원에게 판매 추이나 고객 반응에 관한 별도의 인터뷰도 진행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 책에 대한 구체적인 고객 평가나 직원의 의견을 단정하기는 어렵다.
그럼에도 현장에서 확인한 가장 분명한 사실은 이 책이 독자들이 쉽게 발견할 수 있는 비소설 베스트셀러 코너에 진열돼 있었다는 점이다. 대형 서점의 베스트셀러 코너는 매장을 방문한 고객이 별도의 사전 정보 없이도 최근 주목받는 책을 발견하게 만드는 공간이다. 책을 구매할 계획 없이 서점에 들어온 사람도 순위표와 표지를 훑어보면서 새로운 제목을 접할 수 있다. 그런 공간에서 한국 작가의 에세이가 9위로 소개되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한국 출판물이 싱가포르의 일상적인 독서 환경에 진입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물론 한 지점에서 확인한 베스트셀러 순위를 싱가포르 전체 출판시장의 판매량이나 독자 선호를 대표하는 공식 지표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 순위는 지점과 집계 시기, 재고와 진열 방식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그러나 취재 당시 한국 작가의 영어 번역서가 일반 비소설 베스트셀러 사이에서 비교적 눈에 잘 띄는 위치에 놓여 있었다는 것은 분명했다. 현장에서 고객의 직접적인 반응은 확인하지 못했지만, 적어도 현지 독자들이 우연히 책을 발견하고 내용을 접할 수 있는 가시성은 확보하고 있었다.
< 싱가포르 파퓰러 북스토어(POPULAR Bookstore) 비소설 베스트셀러 코너 9위에 오른 한국 에세이 『게으른 게 아니라 충전 중입니다』 - 출처: 통신원 촬영 >
해당 도서는 한국 작가이자 일러스트레이터인 댄싱 스네일의 에세이로, 영어판은 클레어 리차즈(Clare Richards)가 번역했다. 영국 출판사 보니에 북스(Bonnier Books) 산하 라곰(Lagom)에서 2024년 11월 출간됐으며, 출판사는 이 책을 건강·웰빙, 정신건강, 자기계발 분야의 성인 논픽션(Nonfiction)으로 소개한다.
출판사 소개에 따르면 이 책은 일과 생산성이 중시되는 사회에서 휴식과 이른바 ‘게으름’을 약점이나 성격적 결함이 아니라 재충전을 위해 필요한 과정으로 바라보도록 제안한다. 짧은 글과 일러스트를 결합한 형식으로 구성됐으며, 무기력과 외로움, 지나친 생각, 성인이 되어가는 과정에서 경험하는 피로감 등을 다룬다.
영문판 제목인 『I’m Not Lazy, I’m on Energy Saving Mode』는 직역하면 ‘나는 게으른 것이 아니라 에너지 절약 모드에 있는 것’이라는 뜻이다. 짧고 유머러스하지만, 끊임없이 생산적이어야 한다는 압박을 받는 사람들에게는 직관적인 위로가 될 수 있는 문장이다.
싱가포르는 한국과 마찬가지로 학업과 직장생활에서 효율과 성과가 강조되는 도시사회다. 빠르게 움직이는 도시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에게 ‘쉬어도 괜찮다’,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상태도 회복의 일부일 수 있다’는 메시지는 낯설지 않다. 번아웃과 관계 피로, 타인과의 비교를 경험하는 독자라면 작가가 다루는 감정을 자신의 일상과 연결해 읽을 수 있다.
온라인 서점에서도 한국의 자기돌봄 에세이가 하나의 유사한 독서 관심군으로 묶이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온라인 서점 아마존 싱가포르(Amazon Singapore)의 『게으른 게 아니라 충전 중입니다』 판매 페이지에서 ‘이 책을 본 고객들이 찾아본 상품(Customers who viewed this item also viewed)’ 항목을 살펴보니 여러 한국 에세이의 번역판이 함께 노출됐다.
화면에는 댄싱 스네일의 또 다른 책 『적당히 가까운 사이(It’s Okay Not to Get Along with Everyone)』, 김수현의 『나는 나로 살기로 했다(I Decided to Live as Me)』, 백세희의 『죽고 싶지만 떡볶이는 먹고 싶어(I Want to Die but I Want to Eat Tteokbokki)』와 후속작 등이 나타났다. 해당 항목은 공식 판매 순위가 아니라 이용자의 조회와 온라인 추천 알고리즘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그러나 한국에서 출발한 자기돌봄·관계·마음 건강 에세이들이 싱가포르의 온라인 서점에서도 서로 연관된 독서 콘텐츠로 제시되고 있다는 점은 확인할 수 있었다.
< 온라인 서점 '아마존 싱가포르(Amazon Singapore)'에서 해당 도서와 함께 노출된 한국 번역 에세이들 - 출처: '아마존 싱가포르' 웹사이트 캡처 >
이 가운데 김수현의 『나는 나로 살기로 했다』는 한국에서 큰 인기를 얻은 에세이로, 해외 출판사 소개에 따르면 타인과의 비교를 멈추고 자기 삶을 살아가는 방법을 다루는 책이다. 백세희의 『죽고 싶지만 떡볶이는 먹고 싶어』는 저자가 정신과 상담 내용을 바탕으로 쓴 회고록 성격의 에세이로, 불안과 우울, 자기혐오의 순환을 다룬 작품으로 소개된다. 두 책 모두 한국에서 출발했지만 영어 번역을 통해 해외 독자에게 소개됐고, 싱가포르에서도 오랫동안 큰 인기를 끈 바 있다.
흥미로운 점은 이들 책이 모두 한국 대중문화의 전형적 이미지와는 다른 방식으로 해외 독자와 만난다는 것이다. 케이팝과 한국 드라마가 음악, 영상, 스타 팬덤을 통해 소비된다면, 한국 에세이는 일상적인 감정과 마음의 상태를 언어화하는 방식으로 독자에게 다가간다. 화려한 퍼포먼스나 빠른 서사 대신, ‘나는 왜 이렇게 지쳤을까’, ‘모든 사람과 잘 지내야 할까’, ‘남과 비교하지 않고 살 수 있을까’ 같은 질문이 중심에 놓인다. 이러한 질문이 대한민국이라는 특정 국가의 문화적 경험에만 머물지 않고, 비슷하게 경쟁적인 환경 속에서 치열하게 도시 생활을 살아가고 있는 싱가포르 독자에게도 쉽게 공감을 얻고 위로를 주고 있다.
싱가포르의 독서 환경에서 영어 번역은 중요한 역할을 한다. 싱가포르는 영어를 공용어로 사용하는 다언어 사회이기 때문에, 한국어 원서를 읽지 못하는 독자도 영어 번역서를 통해 한국 작가의 글을 접할 수 있다. 특히 한국 에세이는 번역을 통해 제목과 메시지가 비교적 직접적으로 전달되는 장르다. 드라마나 영화가 자막과 영상으로 감정을 전달한다면, 에세이는 독자가 자신의 속도에 맞춰 문장을 읽고 개인적인 경험과 연결할 수 있다는 점에서 다른 종류의 친밀감을 만든다.
싱가포르 국립도서관 온라인 목록에서도 이러한 한국식 힐링 에세이들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이는 한국의 도서가 상업 서점뿐 아니라 공공 독서 인프라 안에서도 접근할 수 있는, 그만큼 사람들이 찾고 있는 책으로 분류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싱가포르에서 한국 콘텐츠가 영상 플랫폼과 공연장, 식음료 매장뿐 아니라 서점과 도서관의 목록 안에서도 발견된다는 점은 한국문화 소비의 접점이 점차 넓어지고 있음을 시사한다.
< 싱가포르 국립 도서관에서 대여 가능한 한국 힐링 에세이들 - 출처: 싱가포르 국립 도서관 웹사이트 >
파퓰러 북스토어 지점 한 곳의 비소설 베스트셀러 코너와 아마존 싱가포르의 추천 화면만으로 한국 에세이 전체의 인기를 단정할 수는 없다. 서점 순위는 지점과 시기, 진열 방식에 따라 달라지며 온라인 추천 목록도 이용자 조회 기록과 알고리즘의 영향을 받는다.
그럼에도 오프라인 서점에서 한국 작가의 에세이가 비소설 베스트셀러 코너 안에 진열되고, 온라인 서점에서는 다른 한국 번역 에세이들과 함께 노출되며, 싱가포르 국립 도서관의 디지털 도서관에서도 대여할 수 있다는 사실은 한국 출판 콘텐츠가 싱가포르 독서 환경에서 일정한 가시성을 확보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최근 싱가포르에서 한국문화는 여러 방향으로 확장되고 있다. 한국 드라마와 음악, 공연, 음식과 화장품을 넘어 이제는 한국 작가들이 일상의 감정과 관계, 마음 건강을 이야기하는 방식도 번역을 통해 현지 독자에게 전달되고 있다. 한류가 화면과 공연장에만 머무르지 않고 책장을 통해 개인의 마음과 일상으로 들어가고 있는 것이다.
『게으른 게 아니라 충전 중입니다』가 전하는 메시지는 단순하다. 지친 상태를 실패나 게으름으로만 보지 말고 자신을 돌보는 시간으로 받아들이자는 것이다. 이 책이 싱가포르 서점의 비소설 베스트셀러 코너에 놓여 있었다는 사실은 한국식 위로의 언어가 국경을 넘어 읽히고 있음을 보여주는 하나의 현장이다.
한국 에세이는 거창한 문화행사나 대규모 팬덤이 아니라 조용한 문장과 그림을 통해 싱가포르 독자에게 다가가고 있다. 서점의 작은 베스트셀러 순위표에서 발견된 한국 작가의 이름은 한류가 사람들의 마음과 일상에 스며드는 또 다른 방식을 보여주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