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 『채식주의자』, 상하이에서 몸으로 다시 쓰이다
- 노벨문학상 이후, 읽히는 문학에서 상연되는 문학으로 -
70분 동안 무대 위에는 몇 마디의 내레이션뿐 대사 한 줄도 없었다. 마지막 장면에서 불에 탄 나뭇가지 같은 모양의 가느다란 막대가 소나기처럼 무대 위로 쏟아져 내렸다. 원작 3부의 제목 「나무 불꽃」을 그대로 옮긴 장면이다. 암전과 동시에 객석에서 박수가 터졌고, 커튼콜이 몇 차례 반복되는 동안에도 박수는 좀처럼 잦아들지 않았다. 공연이 끝난 뒤에는 몇몇 관객이 무대 앞까지 다가가 바닥에 흩어진 막대를 하나씩 집어 들고 기념 사진을 찍었다.
상하이 양푸구(杨浦区) 영(YOUNG)극장에서 9월 4일부터 6일까지 사흘간 열린 무용극 <채식주의자(素食者)>의 재연 무대다. 한강의 소설 『채식주의자』를 원작으로 삼되, 연출, 안무, 극작, 무대, 음악을 모두 중국 창작진이 맡았다. 올해 3월 6~8일 같은 극장에서 세계 초연했고, 6월 아나야 연극제(阿那亚戏剧节) 특별초청 공연을 거쳐 다시 상하이로 돌아왔다. 한국 문학이 중국 무대에 오른 사례가 처음은 아니다. 한국에서 완성된 공연이 수입된 것이 아니라, 원작 판권만 건너가고 나머지는 전부 현지에서 만들어졌다. 노벨문학상 수상 이후 한국 문학이 중국에서 어떤 경로로 유통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지금 시점에서 가장 선명한 사례 가운데 하나다. 이 작품의 출발점은 2016년이다. 극작가 좡자윈(庄稼昀)이 『채식주의자』를 처음 읽었고, 2017년 안무가 겸 연출가 장판(江帆)에게 책을 건넸다. 처음 구상은 솔로 무용 작품이었다. 두 사람은 2014년부터 협업해 온 사이로, 2017년 창작 그룹 ‘싼중완 합작사(三种碗合作社)’를 함께 세웠다. 무용과 연극의 경계를 지우고 동시대 사회 의제, 특히 여성 의제를 극장으로 끌어들이는 것을 표방한 팀이다. 왜 무용이었을까. 좡자윈이 소설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서사 구조였다. 남편, 형부 그리고 언니의 각자 시점이 영혜를 이야기하면서도 끝내 영혜에게 1인칭을 주지 않는다는 점, 이 “존재하지만 말하지 못하는” 이야기의 구조를 후각, 촉각, 청각, 시각이 뒤엉킨 강한 감각 묘사로 표현한 원작의 표현 기법이 폭력과 권력의 감각과 맞물려 있다고 보았고, 바로 그 부분이 오히려 무용으로도 관객에게 전달될 수 있다고 판단했다고 전했다. 그는 소설을 처음 읽었을 때 지속적으로 밀려온 “불편함”을 기억한다고 말한다. 그 불편함을 미화하지 않는 것이 이 작품의 원칙이 됐다. 그는 무용이 꼭 아름다울 필요는 없으며, 보기 좋지 않고 관객을 기쁘게 하지 않아도 된다고 여러 인터뷰에서 강조한 바 있다. 그가 정리하는 원작의 폭력은 네 겹이다. 일상화된 폭력, 신체 내부의 폭력, 응시와 권력의 폭력, 그리고 침묵과 공백의 폭력. 관객을 ‘응시를 구경하는 자리(让观众从观看‘凝视’)에서 ‘응시하는 자(到作为‘凝视者’)’의 자리로 옮겨 놓겠다는 것이 연출의 목표였다. 작품은 원작의 줄거리를 재현하지 않는다. 대사와 사실주의적 표현을 덜어내고, 남은 언어의 상당 부분은 소리로 바꿨다. 좡자윈은 리허설 기간 드라마투르기(Dramaturgy)를 겸하며 원작 텍스트를 무대로 옮겨냈다, 신체의 어휘와 안무만으로 감정과 정보를 감당할 수 있게 되는 지점에서 언어는 최대한 배제해도 된다고 판단했다고 밝혔다. 각색에서 가장 눈에 띄는 선택은 서막이다. 원작에서 영혜가 손목을 그은 직후 떠올리는 기억, 아홉 살 여름 자신을 물었던 개가 오토바이에 매달려 달리다 죽고 그 고기가 식탁에 올랐던 일이 통째로 작품의 첫 장면이 됐다. 개를 끌던 줄이 주인공의 손에도 쥐여진다. 평론가 류칭(柳青)은 이 서막을 두고 “영혜가 1인칭을 되찾는 일”이라고 썼다.
두 번째 선택은 일곱 명의 배우를 ‘다기능 신체’로 쓰는 방식이다. 이들은 배역인 동시에 냉장고이고 가구이고 식탁이며, 냉장고에서 던져지는 고깃덩어리이기도 하다. 좡자윈은 이를 두고 배우들이 “시스템 자체”가 되게 하려 했다고 설명했다. 세 번째는 일상 사물의 변형이다. 회사 회식 장면에서 여섯 명의 무용수가 일제히 하이힐을 신는다. 신발은 불편하고 자세는 어색한데, 그 어색함을 여섯 명이 완벽하게 동작을 맞춰가며 영혜를 향해 다가온다. 하이힐 한 켤레가 사회 구조의 집단적 규율을 압축한다. 남편이 영혜에게 입히는 펜슬 스커트, 언니 집에 갈 때 걸쳐주는 흰 카디건도 마찬가지다. 그 카디건은 가족이 그를 붙들고 고기를 먹이는 순간 그를 묶는 끈으로 바뀐다. 디자인도 같은 논리를 따랐다. 무대 디자인을 맡은 선리(沈力)는 연질 유리와 플라스틱 필름이라는 일상에서 볼 수 있는 재질로 무대를 꾸몄다. 무대 면적에 가까운 원형 철제 구조에서 발처럼 늘어뜨린 투명 막이 빗줄기 같기도 숲 같기도 하다. 의상 디자인을 맡은 쩡윈주(曾韵竹)가 말한 이번 무대 의상의 콘셉트는 ‘눌린 신체’다. 기본 무용 의상 안에 쿠션을 덧댄 듯 충전재를 넣어두었다가 장면이 진행될수록 조금씩 덜어내, 인간의 체계와 사유를 한 겹씩 벗겨내는 과정을 실루엣(silhouette)으로 보여준다. 음악 감독 왕이(王懿)는 악기 디지털 인터페이스(MIDI) 전자음악을 사용해 현대적 기법을 쓰되, 동아시아 전통 타악기와 리듬을 가져와 ‘국가와 세대를 건너 전해지는 것’의 주제로 삼고 연극 음악을 작업했다고 밝혔다. 마지막 장면이 앞서 언급한 「나무 불꽃」이다. 무대에는 불붙은 나뭇가지를 닮은 가느다란 발광체가 무대 천장에서 폭우처럼 쏟아진다. 앞선 장면들이 흑회색과 흙빛으로 조명은 어둡게 깔려 주인공의 억눌림을 표현했던 가운데, 유일하게 빛이 밝게 무대를 비추었다. 상하이 매체 신민완바오(新民晚报)의 평론가 주광(朱光)은 이 장면을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아름답다”고 쓰면서도, 그 빛은 별처럼 수놓은 희망들처럼 보이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오직 점점이 빛날 뿐이라고 덧붙였다.
이에 덧붙여, 평론가 주광은 무용극이 본래 서사 진행에 능하지 않다는 특성을 지적하며, 원작을 읽지 않은 관객이 3부로 나뉜 구조와 세 개의 시점, 연속적인 줄거리를 무용으로 알아보기는 어렵다고 썼다. 하지만 평론의 결론은 이 연극이 “원작을 다시 읽게 만드는 열쇠”라는 것이다. 반면 극작가 주이(朱宜)는 원작보다 이 무용극을 더 좋아한다고 밝히면서, 원작은 영혜를 객체화한 시점으로 서술한다면 연극은 주인공의 안무가 이를 완전히 뒤집어 놓았다는 점을 이유로 들었다. 한국 문화 산업이 이번 사례로 얻을 시사점은 세 가지 정도로 정리할 수 있다. 우선, 한국에서 만들어진 연극의 완제품 수출이 아닌 ‘지식재산권 라이선싱(IP Licensing)형 현지 창작’ 모델이다. 이 작품에서 한국이 공급한 것은 원작 텍스트와 각색 승인뿐이다. 창작·제작·유통은 전부 중국 측이 감당했다. 이번 판권 협의는 제작진이 한강 작가의 『채식주의자(素食者)』 중국어판 출판사에 직접 메일을 보내는 데서 시작됐다. 출판사가 한강 작가에게 소식을 전했고, 작가의 지지 아래 대리기관과 계약이 성사되는 경로였다. 앞서 조남주 작가와 김애란 작가의 원작 소설 연극화 사례와 함께 놓고 보면, 중국에서 한국 문학이 ‘읽히는 것’에서 ‘상연되는 것’으로 확장되는 흐름이 뚜렷하다. 무대화, 영상화 등 2차 저작권을 체계적으로 중개하고 관리할 창구가 한국에도 마련될 필요가 있어 보인다. 그다음으로는, 언어 장벽이 낮은 장르라는 점이다. 70분 공연에서 언어는 내레이션에 그친다. 무용수의 표정과 몸짓, 소리, 빛으로 이루어진 작품은 번역 손실이 작고 국제 유통에 유리하다. 실제로 이 작품은 전국 투어와 국제 쇼케이스를 준비 중이다. 그러나 ‘한국적인 것’은 무대에서 거의 지워졌다. 이 작품에서 한국은 배경이 아니다. 원작, 소설가 이름과 주인공의 이름 영혜 외에 한국 사회를 드러내는 연극적 요소는 없었다. 관객은 한강과 『채식주의자』를 기억하지만 한국을 경유하지는 않았다. 한 편의 한국 소설이 중국 청년 창작자들의 손에서 자신들의 문제로 다시 쓰이고, 그 결과물이 다시 중국 관객에게 원작을 읽게 만드는 순환이 만들어지고 있다.
사진 출처 및 참고자료 - 통신원 촬영 - ≪위챗(WeChat)≫ (2026. 03. 07). 推荐!舞蹈剧场《素食者》全球首演 以身体重译诺奖文学经典, https://mp.weixin.qq.com/s/HnR5MC0HwWPWoDJLod3hqw - ≪위챗(WeChat)≫ (2026. 03. 08). 朱光:舞剧《素食者》如何以极致视听诠释韩江笔下的女性寓言, https://mp.weixin.qq.com/s/hDqnKmlBQFvPwmQbh3yCTQ - ≪위챗(WeChat)≫(2026. 07. 03). 柳青丨再读韩江,看见英惠——关于舞蹈剧场《素食者, https://mp.weixin.qq.com/s/ASzZ7joI8qeygmxpaLJpNg - 샤오홍슈 ‘舞蹈剧场素食者’ 계정(@95846721176), https://xhslink.cn/o/18qgBDc5FgZ