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미술사의 주인공인가… 스페인 레이나 소피아 미술관이 다시 쓰는 미술사의 계보
- 2026~2027년 새 시즌 9개 기획전 중 8개를 여성 작가에 할애 -
스페인 마드리드(Madrid)의 국립현대미술관 레이나 소피아(Museo Nacional Centro de Arte Reina Sofía)가 미술관이 만들어온 예술의 역사를 다시 바라보고 있다. 2026년 9월 발표된 2026~2027년 새 시즌 프로그램에서는 총 9개의 기획전 가운데 8개가 여성 작가에게 할애됐다. 미술관은 이번 시즌을 소개하면서 신체의 중요성, 관람객의 적극적인 참여와 함께 ‘미술사적 정전의 확장’을 주요 방향으로 제시했다. 단순히 여성 작가의 전시 수를 늘리는 데 그치지 않고, 지금까지 미술사의 중심에서 상대적으로 조명받지 못했던 작가와 작품을 다시 살펴보겠다는 것이다. 이번 변화의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레이나 소피아 미술관이 최근 몇 년간 추진해온 컬렉션 재구성 작업을 함께 살펴볼 필요가 있다. 미술관은 2026년 2월 ‘현대미술: 1975년~현재(Colección. Arte contemporáneo: 1975-Presente)’라는 새로운 상설 컬렉션을 공개했다. 스페인의 민주화 이행기인 1975년부터 현재까지 약 50년의 현대미술을 403점의 작품으로 재구성한 전시다. 이 컬렉션에는 224명의 작가가 참여했으며, 개별 작가 198명 가운데 여성 작가는 69명으로 약 35%를 차지했다. 이는 미술관이 상설 컬렉션에서 보여준 여성 작가 비율 가운데 가장 높은 수준이다. 그러나 여기서 35%라는 숫자를 전체 소장품의 여성 작가 비율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미술관 전체 컬렉션에서 여성 작가가 차지하는 비중은 여전히 15% 미만이다. 즉, 35%라는 수치는 전체 소장품의 변화가 아니라 새롭게 구성한 특정 현대미술 컬렉션에서 나타난 비율이다. 이 차이는 오히려 미술관의 변화가 아직 진행 중이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과거에 축적된 소장품의 성별 불균형을 단기간에 바꾸기는 어렵지만, 새롭게 작품을 수집하고 전시하는 과정에서는 다른 기준을 적용하고 있는 것이다. 실제로 최근 작품 수집에서도 이러한 변화가 확인된다. 레이나 소피아는 여성 예술가의 작품을 적극적으로 컬렉션에 편입하는 것을 중요한 수집 방향으로 삼고 있다. 2025년에는 스페인 문화부와 함께 총 404점의 작품을 컬렉션에 추가했으며, 이 가운데 여성 작가 작품에 투입된 금액은 전체 구매액의 58.6%를 차지했다. 2026년 3월 열린 아르코 마드리드(ARCOMADRID)에서도 14명의 작가가 제작한 17점을 구입했는데, 이 가운데 9명이 여성 작가였다. 이러한 수집 정책은 단순히 미술관에 여성 작가의 작품을 더 많이 들여놓는다는 의미를 넘어선다. 미술관의 컬렉션은 어떤 작품을 보존하고 전시할 것인지 결정하는 과정이자, 미래의 관람객에게 어떤 작가를 중요한 예술가로 기억하게 할 것인지를 결정하는 문화적 기록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작품 구매 단계에서부터 여성 작가의 비중을 높이는 것은 장기적으로 미술관이 보여주는 미술사의 모습 자체를 바꾸는 출발점이 될 수 있다. 레이나 소피아 미술관이 새롭게 구성한 컬렉션에서 주목되는 부분 역시 여성 작가의 숫자만은 아니다. 전시는 페미니즘과 에코페미니즘, 젠더와 신체, 이주와 인구 이동, 탈식민화 등 동시대 사회의 변화와 연결된 주제를 적극적으로 다룬다. 작품을 단순히 연대순으로 배열하기보다 서로 다른 지역과 세대, 매체와 경험이 교차하도록 구성하면서 기존의 미술사적 분류 방식에도 변화를 주고 있다. 전체 403점 가운데 258점은 이전 상설 컬렉션 전시에서 공개되지 않았던 작품이다. 이러한 방향은 2026~2027년 새 시즌에서 더욱 분명해진다. 9월 23일 개막하는 카나리아 제도 출신 작가 엘리 코르티냐스(Eli Cortiñas)의 전시를 시작으로 마르타 미누힌(Marta Minujín), 앤 트루이트(Anne Truitt), 모니르 샤루디 파르만파르마이안(Monir Shahroudy Farmanfarmaian), 마를렌 뒤마스(Marlene Dumas), 파시타 아바드(Pacita Abad), 페르난다 라구나(Fernanda Laguna) 등 다양한 배경의 여성 작가들이 레이나 소피아의 주요 프로그램에 이름을 올렸다. 미술관은 이들 작가를 통해 여성이라는 공통분모만을 강조하기보다 서로 다른 시대와 지역, 사회적 경험을 가진 예술가들의 작품을 하나의 미술사적 맥락 안에서 바라보도록 한다. 특히 눈여겨볼 부분은 여성 작가를 현재 활동하는 유명 작가에만 한정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레이나 소피아는 기존의 미술사에서 충분히 평가받지 못했던 작가를 다시 조명하고, 상설 컬렉션의 구성 자체를 수정하는 작업을 병행하고 있다. 2027년에는 스페인 현대문화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 ‘27세대(Generación del 27)’ 탄생 100주년을 계기로 컬렉션 일부를 다시 구성하면서 당시 활동했지만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여성 예술가들에게도 주목할 계획이다. 이는 여성 예술가를 ‘추가’하는 방식보다 기존 미술사의 서사를 다시 읽는 접근에 가깝다. 이 같은 움직임은 레이나 소피아라는 미술관의 성격과도 연결된다. 레이나 소피아는 파블로 피카소의 <게르니카>를 비롯해 스페인 현대사의 주요 작품을 소장하고 있는 국립현대미술관이다. 따라서 이곳에서 어떤 작가와 작품이 전시되는가는 단순한 전시 프로그램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한 국가를 대표하는 미술관이 어떤 예술을 중요한 문화적 기억으로 남길 것인지 보여주는 하나의 기준이 되기 때문이다. 또 이번 변화에서 또 하나 주목할 점은 여성 작가를 바라보는 방식이다. 여성 작가의 작품을 별도의 ‘여성 미술’ 영역으로 분리하기보다는 기존의 현대미술사 속에 다시 배치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여성 작가도 중요한 예술가’라는 선언을 넘어, 애초에 미술사에서 중요하다고 평가해온 기준이 누구의 경험과 시선을 중심으로 만들어졌는지를 되묻는 작업이다. 레이나 소피아가 추진하는 변화는 한국의 문화예술기관에도 생각해볼 지점을 던진다. 여성 예술가를 얼마나 많이 전시하는가라는 단순한 수적 균형을 넘어, 기존의 문화적 기록에서 누가 빠져 있었는지를 발견하고 이를 컬렉션과 전시를 통해 다시 기록하는 작업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특히 국립미술관과 같은 공공 문화기관은 현재의 관람객뿐 아니라 미래 세대가 어떤 예술가를 기억할 것인지에 영향을 미친다는 점에서 이러한 역할이 더욱 중요하다. 이러한 변화는 스페인 국내의 문화적 기억을 재구성하는 데 그치지 않고, 해외 문화예술과의 교류가 어떤 방식으로 현지의 미술사적 맥락 안에 자리 잡을 수 있는지를 생각하게 한다. 레이나 소피아의 컬렉션 재구성은 한국문화를 알리기 위한 사업은 아니지만, 특정 국가나 지역의 예술을 일회성 전시에 그치지 않고 작품의 수집과 연구, 교육, 상설 전시를 통해 장기적인 문화적 맥락 안에 편입시키는 방식은 한국문화의 해외 확산에도 시사하는 바가 있다. 한국문화 역시 해외에서 한 차례 소개되는 데 그치기보다 현지 문화기관과의 지속적인 관계를 통해 연구되고, 다시 전시되며, 문화적 기록으로 축적될 수 있는 구조를 확대할 필요가 있다. 레이나 소피아와 한국 현대미술의 교류 사례도 이미 존재한다. 미술관은 2006년 한국 작가 김수자(Kimsooja)의 작품을 마드리드 레티로 공원(Parque del Retiro)의 크리스털 궁전(Palacio de Cristal)에서 선보였다. 김수자의 설치와 영상, 퍼포먼스 작업을 소개한 이 전시는 한국 현대미술이 스페인의 대표적인 미술기관을 통해 소개된 사례 가운데 하나다. 이는 한국문화의 해외 확산이 단순한 국가 홍보 차원을 넘어 현지 미술관의 전시 기획과 예술적 담론 안에서 이루어질 수 있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경험을 앞으로는 보다 장기적인 문화교류로 발전시킬 필요가 있다. 한국 작가의 작품을 해외 미술관에서 전시하는 것뿐 아니라 현지 기관과의 공동연구, 작품 대여와 아카이브 교류, 작가 연구 및 교육 프로그램 등으로 협력의 범위를 넓힌다면 한국 현대미술에 대한 관심이 일회성 전시에 머물지 않고 지속적인 지식과 문화적 자산으로 축적될 가능성이 커진다. 특히 여성 작가나 상대적으로 해외에 덜 알려진 작가, 회화 외에 공예·섬유·사진·미디어아트 등 다양한 매체의 작가를 현지 기관의 연구와 전시 맥락에 연결하는 것은 한국문화의 범위를 넓히는 하나의 방법이 될 수 있다. 한국에서도 여성 작가와 그동안 상대적으로 조명받지 못했던 예술가들을 재조명하려는 움직임이 이어지고 있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레이나 소피아의 사례는 문화기관의 성평등이 단순한 전시 편성의 문제가 아니라 작품 수집, 상설 컬렉션 구성, 연구와 교육, 그리고 궁극적으로 문화적 기억을 만드는 방식의 문제라는 점을 보여준다. 나아가 한국문화의 해외 진출 역시 단기적인 전시와 행사 횟수를 늘리는 데 그치지 않고, 현지 문화기관과의 지속적인 관계를 통해 한국 작가와 작품에 대한 연구와 전시, 기록을 축적하는 방향으로 확장될 필요가 있다. 결국 레이나 소피아가 던지는 질문은 ‘여성 작가를 몇 명 더 전시할 것인가’에 머물지 않는다. 누가 미술사의 주인공으로 기록되어 왔으며, 앞으로 누구를 기억할 것인가라는 질문에 가깝다. 2026~2027년 레이나 소피아의 새로운 시즌은 이러한 변화가 하나의 전시 기획을 넘어 미술관의 장기적인 방향으로 자리 잡아가는 과정을 보여준다. 미술사의 주인공은 과거에 결정된 인물이 아니라, 오늘날 무엇을 수집하고 누구의 작품을 보여줄 것인가에 따라 계속해서 다시 쓰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한국문화의 해외 확산 역시 단순히 한국을 ‘소개하는 것’을 넘어, 현지 문화기관의 연구와 전시, 교육과 기록 속에 한국의 예술과 문화가 지속적으로 연결되는 구조를 만들어가는 방향으로 확장될 필요가 있다.
사진 출처 및 참고자료 - 레이나 소피아 박물관(Museo Nacional Centro de Arte Reina Sofía) 웹사이트, https://www.museoreinasofia.es/visita/horarios-tarifas https://www.museoreinasofia.es/prensa/nota-de-prensa/presentacion-de-la-nueva-temporada-2026-27 https://recursos.museoreinasofia.es/descargas/Documento/Dossier%20Colecci%C3%B3n_V9.pdf?utm_source ≪엘 파이스(El Pais)≫ (2026. 09. 08). El museo Reina Sofía, más femenino que nunca con ocho muestras de mujeres artistas, https://elpais.com/cultura/2026-09-07/el-museo-reina-sofia-mas-femenino-que-nunca-con-ocho-muestras-de-mujeres-artistas.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