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5월 18일은 ‘세계박물관의 날(International Museum Day)’이었다. ‘세계 박물관의 날’은 올해로 설립 80주년을 맞은 국제박물관협의회(ICOM)가 1977년에 제정한 기념일이다. 여기에 포함되는 ‘박물관’ 범주에는 일반 박물관뿐만 아니라 미술관, 과학관, 동물원, 식물원, 수족관 등이 모두 해당된다. 한국은 1976년에 국제박물관협의회에 가입했으며, 필리핀은 이보다 앞선 1964년에 가입을 마쳤다. 국제박물관협의회는 첫 주제로 ‘박물관과 환경(Museum & Environment)’을 선정하는 등 1992년부터 매년 특정 주제를 선정해 전 세계 박물관들과 함께 다양한 행사를 개최하고 있다. 2020년대 주요 주제를 살펴보면 2020년 ‘다양성과 포용성을 위한 박물관(Museums for Equality: Diversity and Inclusion)’, 2021년 ‘박물관의 미래: 회복과 재구상(The Future of Museums: Recover and Reimagine)’, 2022년 ‘박물관의 힘(The Power of Museums)’, 2023년 ‘박물관, 지속가능성과 웰빙(Museums, Sustainability and Well-being)’, 2024년 ‘교육과 연구를 위한 박물관(Museums for Education and Research)’이었다. 이어 2025년에는 ‘급변하는 공동체와 박물관의 미래(The Future of Museums in Rapidly Changing Communities)’를 주제로 다루었다. 올해는 ‘분열된 세상을 하나로 잇는 박물관(Museums Uniting a Divided World)’을 주제로 선정하여, 박물관을 통해 다양성을 이해하고 지속 가능한 미래를 구축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필리핀 내 여러 박물관 역시 ‘세계 박물관의 날’을 맞아 다채로운 행사를 기획했다. 유쳉코 박물관(Yuchengco Museum)은 5월 17일과 18일 양일 모든 방문객에게 무료로 개방됐으며, 이를 통해 지역사회 간의 대화와 이해에 초점을 맞춘 올해의 주제와 뜻을 같이한다고 밝혔다. 필리핀 최초 해양 박물관인 AIMS 무세오 마리티모(AIMS Museo Maritimo)에서는 5월 16일과 23일 양일 동안 무료 개방을 통해 필리핀 해양 유산을 조명하는 행사를 열었다. 필리핀 문화와 역사를 상징하는 국립박물관은 패스포트 어플리케이션(App) 출시와 지역별 체험 프로그램을 선보이며 박물관을 친근하게 경험할 수 있도록 유도했다. 유피 마닐라(UP Manila)와 극동 대학교(Far Eastern University)는 역사 유산 탐방을 위한 무료 도보 관광을 제공하고 있다.

< (좌)클락 박물관 출입구, (우)박물관 및 4D 상영관 요금 안내 - 출처: 통신원 촬영>
박물관은 예술과 역사부터 과학, 기술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분야를 아우르며 호기심과 창의성, 비판적 사고를 촉진하는 역동적인 교육 공간이다. 미술관, 과학관, 동·식물원, 수족관 등도 마찬가지로 우리가 사는 세계에 대한 이해를 확장해 주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세계 박물관의 날’을 맞아 한인이 다수 거주하는 앙헬레스 인근 ‘클락 박물관(Clark Museum)’을 찾았다. 이곳은 과거 유산을 되돌아보고 미래를 조명하는 박물관 본연의 취지를 깊이 느껴볼 수 있는 뜻깊은 공간이다. 현대적인 휴양지와 산업단지가 가득한 클락자유무역지구(Clark Freeport Zone)의 화려함 이면에는 거대한 자연재해로 인한 아픔과 격동의 근현대사가 숨어 있다. 1997년 개관한 클락 박물관은 이 지역의 파란만장한 역사를 한눈에 보여주는 곳이다. 클락 박물관은 화산 대폭발이라는 대자연의 비극과 치열했던 전쟁의 상흔을 고스란히 품고 있는 곳으로, 박물관이 단순히 오래된 유물을 전시하는 창고 같은 존재가 아니라 지역 공동체의 정체성을 보존하고 치유하는 ‘살아있는 역사 공간’임을 여실히 보여주는 곳이다. 박물관은 매주 월요일을 제외하고 오전 9시부터 오후 4시까지 관람객을 맞이한다. 입장료는 100페소(한화 약 2,500원)이다. 박물관 옆에는 1991년 전 세계를 뒤흔든 피나투보 화산 대폭발의 생생한 기록을 담은 4D 상영관도 운영 중이다. 20분 분량의 다큐멘터리가 일 4회 상영되며, 박물관 입장료와 별도로 100페소를 추가로 받고 있다. 입장권 구매 후 내부로 들어서면 총 4개의 전시실이 관람객을 과거로 안내한다.
< (좌)토착민인 아에타족에 대한 설명, (우)조세피나 디존 헨슨이 그린 피나투보 화산 - 통신원 촬영 >
1층 전시실에서 대자연 무서움과 더불어 지역 토착민의 삶을 엿볼 수 있다. 특히 관람객들 발길을 붙잡는 것은 600년간 잠들어 있다가 1991년 6월 대폭발을 일으킨 피나투보 화산(Mount Pinatubo) 관련 자료다. 당시 35km 상공까지 솟구친 화산재는 인근 마을을 통째로 집어삼켰고, 최소 800명 이상이 사망했으며, 40만 명이 넘는 이재민이 발생했다. 뾰족했던 산 정상은 분출로 사라지고 거대한 칼데라 호수가 남았다. 전시실에는 대폭발 불과 10일 전인 1991년 6월 2일, 조세피나 디존 헨슨(Josefina Dizon Henson)이 촬영한 피나투보산의 마지막 온전한 모습과 그녀가 남긴 그림이 전시돼 있어 숙연함을 자아낸다. 화산 폭발로 가장 큰 피해를 입은 루손섬 토착민인 ‘아에타족(Aeta)’ 역사도 박물관에서 만나볼 수 있다. 이들이 사용하던 활과 화살 등의 유물은 척박한 환경 속에서도 이어져 온 이들의 삶을 대변한다. 또한 인근의 또 다른 명산인 아라얏산과 그곳에 살고 있다는 마리아 시누쿠안의 전설, 그리고 상업이 발달했던 강줄기를 따라 출토된 동판 등도 확인할 수 있다.
< (좌)클락 비행장 조성 역사, (우)태평양 전쟁 당시 일본군과 교전 내용 - 통신원 촬영 >
계단을 따라 2층으로 올라가면 전시실 3과 4에서 클락의 근현대 역사가 본격적으로 펼쳐진다. 오늘날의 클락은 과거 미군의 핵심 군사 요새였다. 1902년 건설되어 현재는 시민들 휴식처가 된 ‘스토첸버그 공원(Stotsenberg Park)’은 필리핀 전투 중 40세의 나이로 전사한 존 밀러 스토첸버그(John Miller Stotsenburg) 대위를 기린 곳이다. 이어 1920년 명명된 ‘클락 필드(Clark Field)’ 공군 기지는 비행 중 사고로 숨진 해롤드 멜빌 클락(Harold Melville Clark) 소령의 이름에서 유래했다. 전시실에는 1919년 이 지역에 처음 배치된 미 육군 항공대의 초기 비행기 사진부터 태평양 전쟁 당시 일본군의 필리핀 침공 자료, 그리고 당시에 노획된 무기들이 보존되어 있어 치열했던 역사적인 순간을 보여준다. 전쟁의 상흔을 지나 관람의 마지막 동선에 다다르면 클락의 미래 청사진이 관람객을 반긴다. 클락의 역동적인 변화를 보여주는 가장 매력적인 기록은 바로 ‘열기구 축제(Hot Air Balloon Fiesta)’다. 1995년 10개국 21개 열기구로 소박하게 시작했던 이 축제는 이제 도시를 상징하는 대표 아이콘으로 자리 잡았다. 매년 2월 하늘을 화려하게 수놓는 이 축제는, 올해 2월에도 26회째를 맞이하며 개최되었다. 클락 박물관은 전시물의 양이 많거나 화려한 곳은 아니다. 그러나 필리핀의 태양을 피해 시원하고 쾌적한 실내에서 클락자유무역지구와 앙헬레스, 인근 지역을 이해하기에 적합한 장소다.
사진출처 및 참고자료 - 통신원 촬영 - 《지엠에이 네트워크(GMA Network)》 (2026. 5. 16). International Museum Day 2026: Free admissions, heritage tours, and special events to check out, https://www.gmanetwork.com/news/lifestyle/artandculture/987861/international-museum-day-2026-free-admissions-heritage-tours-and-special-events-to-check-out/story/ - 《태틀러 아시아(Tatler Asia)》 (2026. 5. 18). Beyond the galleries: how the National Museum is redefining the Filipino museum experience for IMD 2026, https://www.tatlerasia.com/lifestyle/arts/national-museum-of-the-philippines-international-museum-day-20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