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스카나(Toscana)의 작은 지방 마트 진열대에서 익숙한 신라면 로고가 박힌 주황색 포장지를 발견했을 때의 생경함은 여전히 생생하다. 밀라노나 로마 같은 대도시의 아시아 전용 마트가 아닌, 이탈리아 현지인들이 일상적으로 장을 보는 초저가매장 체인 ‘리들(Lidl)’의 중앙 행사 매대에서 '신라면 김치 에디션'이 당당히 자리를 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실 이전에도 신라면 오리지널 레드 제품이 드물게 모습을 보이긴 했지만, 오리지널 라인업을 넘어 주황색의 김치 에디션 같은 파생 특화 상품까지 진열대에 늘어선 풍경은 또 다른 궤의 충격이었다.
올리브유와 치즈, 와인에 대한 자부심이 유독 높아 타국의 식재료에 폐쇄적이기로 이름난 토스카나 시골 마을에서 일어난 이 자그마한 변화는 단순한 개인적 해프닝이 아니라 이탈리아 식문화 유통 구조가 거센 변화의 파도를 타고 있음을 보여주는 직관적인 신호였다.
< 이탈리아 대형 슈퍼마켓 체인 ‘리들’에 진열된 신라면 김치 에디션 - 출처: 통신원 촬영 >
이탈리아에서 8년 넘게 거주하며 체감한 지방 도시의 식문화는 보수성 그 자체였다. 파스타 면의 종류나 토마토소스 브랜드 선택에는 철저하지만, 이른바 ‘에스닉 푸드(Ethnic Food)’는 일시적인 호기심이나 대도시 젊은 층의 전유물로 여겨지곤 했다. 그러나 최근 슈퍼마켓 계산대 풍경이 달라졌다. 이탈리아 미식 문화의 심장부라 할 수 있는 중소 도시 장바구니에 매콤한 국물 냄새를 풍기는 한국의 인스턴트 라면이 담기기 시작한 것이다.
특히 이탈리아 현지인들이 자주 이용하는 유명 슈퍼마켓 체인 리들이 기획한 ‘코리아 위크(Settimana Coreana)’는 이러한 변화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과거에는 매장 구석진 ‘에스닉 전용 코너(Area Etnica)’에 간장이나 데리야키 소스 같은 아시아 소스 몇 개가 놓여 있던 수준이었다면, 이제는 대중적인 테마 주간 행사의 메인 상품으로 한국 라면과 간편식이 등장해 현지 소비자들의 선택을 받고 있다.
이러한 개인적인 체감은 현지 식품 산업 및 유통 전문 매체의 데이터와도 정확히 일치한다. 이탈리아 푸드 마케팅 컨설팅 매체 《마테오 콜로루(Matteo Coloru)》의 2026년 리포트에 따르면, 이탈리아 내 ‘한국 음식’ 관련 온라인 검색량은 전년 대비 +83% 급증했다. 리포트는 이탈리아 슈퍼마켓 체인에서 단 1년 만에 4만 5천 개 이상의 한국 식품이 판매되었으며, 이탈리아 소비자가 ‘에스닉 푸드’를 선택할 때 아시아 음식을 선택하는 비중이 42%에 달했다고 분석한다.
특히 《마테오 콜로루》는 “과거 일식이 이탈리아 대형 마트 진열대에 정착하기까지 15년이 걸렸다면, 한국 음식은 소셜 미디어와 대형 유통망(GDO)의 결합으로 그 절반도 안 되는 기간에 대중화 단계로 진입했다”고 평가했다. 그동안 밀라노와 로마 등 대도시에 집중되었던 한국 음식 열풍이 이제 토스카나를 비롯한 지방 중소 도시의 ‘발견 및 확장 단계’로 구조적 이동을 시작했다는 진단이다.
이탈리아 유통 컨설팅 기관 《로첼리 컨설팅(Rocchelli Consulting)》의 리포트는 이 현상을 이탈리아 대형 유통망(GDO)의 카테고리 매니지먼트 변화 관점에서 해석한다.
과거 아시아 식품은 특정 수입상이나 소수 취향을 위한 틈새 품목에 불과했으나, 최근 이탈리아 대형 유통망 체인들은 이를 대중적 매출을 견인하는 핵심 카테고리로 재정의했다. 리들의 코리아 위크처럼 명확한 주제를 가진 테마 행사를 통해 구매 장벽을 낮추고, 일반 파스타 및 면류 진열대와의 인접 배치를 통해 진입 문턱을 허물고 있는 것이다.
유통망의 변화와 맞물려 실제 현지에서 구매해 맛본 제품들의 풍미 차이 역시 매우 흥미로운 시식 경험을 선사한다. 이탈리아를 비롯한 유럽 시장에서 유통·판매되는 신라면 오리지널은 오히려 한국에서 먹던 신라면보다 매운맛이 확연히 강하게 느껴진다. 국물의 칼칼함과 캡사이신의 자극이 더 자극적으로 다가와, 웬만큼 매운 음식에 익숙한 사람에게도 꽤 얼큰하게 느껴지는 편이다. ‘한국음식은 곧 매운 음식’이라는 일종의 브랜드화가 아닐까 짐작되는 부분이다.
< 또 다른 대형 체인 마트 ‘파노라마(Panorama)’에 진열된 신라면 컵라면 매운맛과 오리지널 - 출처: 통신원 촬영 >
반면 이번 리들의 코리아 위크를 통해 접한 ‘신라면 김치 에디션’은 오리지널 제품과 완전히 다른 결을 보여주었다. 신라면 특유의 꼬들꼬들한 면발은 그대로 유지되어 있었지만, 국물은 원작이나 유럽판 오리지널에 비해 매운맛이 한층 완화되어 덜 맵고 순하게 느껴졌다. 강렬한 매운맛의 진입 장벽을 낮추는 대신 김치 특유의 감칠맛과 순해진 국물을 전면에 내세운 이러한 풍미는, 식문화의 보수성이 강한 이탈리아 현지 소비자들이 한국 라면이라는 생소한 카테고리에 부담 없이 다가갈 수 있게 돕는 요소로 작용하고 있다.
토스카나의 작은 슈퍼마켓 진열대에서 만난 신라면 오리지널과 김치 에디션은 단순한 한국 라면 몇 봉지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미식의 보수성이 강한 이탈리아 지방 도시의 정서와 현지 유통망의 체질 개선, 그리고 글로벌 케이 컬처 확산이 만나는 접점에서 피어난 문화적 지표다. ‘매운맛’이라는 낯선 자극과 감칠맛이 전통적인 이탈리아 식탁 위로 자연스럽게 스며드는 지금, 한국 라면은 일시적인 유행을 넘어 이탈리아 대중 식생활의 새로운 선택지로 안착하고 있다.
사진 출처 및 참고자료
- 통신원 촬영
- 《마테오 콜로루(Matteo Coloru)》, (2026. 04. 30), Korean food Italia 2026, +83% ricerche e fermentazione mainstream,
https://matteocoloru.it/blog/korean-food-italia-fermentazione
- 《로첼리 컨설팅(Rocchelli Consulting)》, (2026. 01. 15), Prodotti alimentari asiatici nella GDO: evoluzione e strategie,
https://www.rocchelliconsulting.com/prodotti-alimentari-asiatici-grande-distribuzion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