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앙헬레스 코리아타운을 알리는 표지석(좌) / 앙헬레스에 조성된 코리아타운 길거리(우) - 출처: 통신원 촬영 >
필리핀 팜팡가(Pampanga)주 앙헬레스(Angeles)에 자리하고 있는 ‘필암 프렌드십 하이웨이(Fil-Am Friendship Highway)’는 아는 사람에게는 유명한 곳이다. 늘 더운 열대 지방, 그 가운데에서도 8월은 우기이기에 더욱 습한 공기가 가득한 필리핀 길가에 끝없이 늘어선 한글 간판들이 시선을 사로잡는다. 마닐라 북쪽으로 약 90km 떨어진 이 도시는 필리핀 내에서 가장 밀도 높은 한인 사회가 형성된 곳이자, 한류가 일상생활 깊숙이 뿌리내린 대표적인 도시라고 할 수 있다. 앙헬레스와 인접한 클락(Clark)은 과거 미군 기지 배후 도시로 출발해 오늘날 동남아시아 한류 소비의 거점이자 재외동포 사회의 핵심축으로 자리 잡았다.
‘필암 프렌드십 하이웨이’를 따라 약 2~3km에 달하는 앙헬레스 코리아타운은 단순히 한인 상권이 아니라 ‘작은 한국(Little Korea)’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991년 6월, 피나투보 화산(Mount Pinatubo)의 분화 여파로, 1992년 11월 미국은 클락 공군기지(Clark Air Base)를 완전히 폐쇄하고 해당 기지를 필리핀 정부에 반환했다. 미군이 완전히 철수하고 난 2000년대 초반 한국인들이 해당 지역에 정착하면서 인근 지역에는 한때 2만 명 이상에 달하는 한인들이 거주하며 공동체를 형성했다.
주말 저녁, 앙헬레스 코리아타운 한복판에 자리한 대형 삼겹살 전문점을 찾은 손님 가운데 약 70%는 필리핀 현지인이었다. 코리아타운이 형성되던 초기에는 주로 한국인 교민이나 관광객들의 발길이 이어지던 상권이었으나, 이제는 완벽하게 현지 주민들의 일상 속 외식 문화로 깊숙이 뿌리내린 모습이다. 식당을 찾은 인근 주민 자스민 씨(24)는 “주말 외식 중 하나로 친구 또는 가족과 함께 한국 식당을 찾는다. 아직 한국에 방문한 적은 없지만 한국 드라마에서 보던 음식을 직접 먹을 수 있는 재미와 함께 필리핀 음식과 달리 다양한 반찬이 무제한 제공되는 점이 매우 매력적이다”라고 전했다.
이러한 소비 흐름에 발맞추어 한식당들도 필리핀 사람들의 입맛을 사로잡기 위해 달콤한 양념 소스를 추가하거나, 현지 식초와 고추를 결합한 양념을 선보이는 등 ‘식문화 융합(Culinary Fusion)’을 시도하고 있다. 이러한 시도는 필리핀 사람들이 사랑하는 매콤달콤한 ‘타미스-앙항(Tamis-Anghang)’과 어울린다. 나아가 이러한 한인 상권의 성장은 인근 지역 고용 창출 효과로 이어지고 있다. 대형 삼겹살 전문점과 한식 매장들은 10~20명에 이르는 현지 인력을 적극적으로 채용하며 지역 사회의 든든한 경제적 버팀목 역할을 해내고 있다.
또한 대형 한국 마트인 ‘싱싱마트’, ‘아임마트’ 등에서는 한국에서 직접 수입한 인기 과자와 음료는 물론, 현지에서 신선하게 직접 제조한 한국식 김치와 다양한 반찬류가 대중적인 인기를 얻으며 판매되고 있다. 아울러 한국식 편의점을 표방하는 ‘뻔한마트(Funhan Mart)’ 등에서는 즉석 라면 조리기를 이용해 라면을 끓여 먹는 필리핀 사람들이 많다. 이는 한국 대중문화가 일시적인 유행을 넘어섰으며, 한국 식문화 역시 일회성이나 ‘특별한 경험’에 머무르지 않고 현지인들의 ‘일상적 소비’ 영역으로 깊숙이 침투했음을 보여주는 좋은 예라고 할 수 있다.
앙헬레스 코리아타운의 한류는 먹거리에 국한되지 않고, 도로변을 따라 ‘케이 뷰티’를 표방하는 한국식 미용실, 피부관리실, 한국식 찜질방, 심지어 한국인이 운영하는 약국과 병원도 운영되고 있다. 특히 현지 젊은 층 사이에서 가장 인기를 끄는 곳은 한국식 미용실이다. 한국인 미용사가 상주하며 다양한 머리 모양을 연출해 주는 곳은 비싼 가격에도 불구하고 인기가 높다. 미용실에서 만난 렌 씨(28)는 “한국 미용실은 두피 관리부터 스타일링까지 서비스의 질이 매우 높다. 필리핀 미용실보다 비싸지만 충분한 가치가 있다”라고 말했다. 과거 교민들이 향수를 달래던 코리아타운은, 이제 우리의 맛과 멋을 품은 채 현지 주민들의 일상을 채워주는 삶의 공간으로 깊이 뿌리내리고 있다.
< 앙헬레스 한글학교 게시판 - 출처: 통신원 촬영 >
이러한 모습 뒤에는 한인 공동체 지속을 위해 노력하는 교육 현장도 존재한다. 1998년 설립된 앙헬레스 한글학교는 한인 자녀와 다문화 가정 아동들을 대상으로 한국어 및 역사·문화 교육을 제공하고 있다. 매주 토요일 교실 안은 서툰 한국어로 시를 읽고 전통 악기를 배우는 학생들의 열기로 가득하다. 한-필 다문화 가정이 증가하면서 한글학교의 정체성 확립과 문화 통합 역할은 더욱 중요해졌다. 학교 관계자는 통신원에게 “한글학교는 단순한 언어 교육을 넘어 한국인으로서의 뿌리와 현지 사회 구성원으로서의 자부심을 심어주는 공간”이라고 밝혔다.
앙헬레스 코리아타운은 한·필 문화가 공존하는 거점 역할을 하고 있으나, 안팎으로 여러 악재에 직면해 있다. 상권 과열과 임대료 상승, 현지 문화 이해 부족 같은 내부 문제에 더해, 상권의 주요 축인 한국인 관광객 수마저 전년 대비 약 20% 감소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위기 속에서 한인 사회 스스로 자정 노력과 상생 활동이 활발해지고 있다. 중부루손(Central Luzon) 한인회를 중심으로는 현지 소외계층을 위한 무료 의료 봉사, 태풍 피해 복구 지원, 한비문화축제 개최 등 사회공헌 활동을 지속적으로 펼치며 ‘더불어 살아가는 공동체’로 발돋움하고자 노력하고 있다. 중부루손 한인회 관계자는 “경제적 이익만을 추구하는 상권이 아니라 현지 주민을 존중하고 나눔을 실천하는 진정한 공동체로 거듭나야 한다”고 강조했다. 코리아타운이 필리핀 내 지속 가능한 한류 거점이 되기 위해서는, 이러한 노력과 함께 한국국제문화교류진흥원이나 주필리핀 한국문화원 등 공공기관과 연계가 필요하다. 민간의 상생 노력에 공공기관의 체계적인 지원이 더해질 때, 앙헬레스 코리아타운은 양국 사이 ‘문화 교류 중심지’로 자리매김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