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레이시아 북부 페낭(Penang)에서 차량으로 약 2시간 거리에 위치한 페락(Perak)주 쿠알라 캉사르(Kuala Kangsar)에는 말레이시아를 대표하는 전통 수공예품인 라부 사용(Labu Sayong) 이 전승되고 있다. ‘라부(Labu)’는 말레이어로 호박을 비롯한 박과 식물을 뜻한다. 라부 사용이 가운데가 잘록하고 위아래가 둥근 표주박 형태를 띠고 있기 때문에 붙은 이름이다. 실제 박의 속을 비워 물을 담아 마시던 방식이 도자기 형태로 발전하면서 오늘날의 라부 사용이 만들어졌다고 한다. ‘사용(Sayong)’은 지역 이름으로, 이곳은 페락강(Sungai Perak) 인근에 위치해 있어 라부 사용 제작에 적합한 양질의 점토와 충적토가 풍부한 지역이다.
일부 라부 사용은 독특한 제작 공정 때문에 짙고 윤기 나는 검은빛을 띤다. 가마에서 막 꺼낸 도자기를 곧바로 왕겨(벼 껍질) 더미에 묻어 연기를 입히면 탄화 과정이 일어나면서 검은빛이 형성된다. 이후 매끄러운 자갈로 표면을 문질러 광택을 내는 방식으로 라부 사용 특유의 깊은 색감과 질감이 완성된다. 라부 사용은 냉장 기술이 보편화되기 이전에 시원한 물을 보관하는 데 쓰였다. 유약을 바르지 않은 채 구워 내기 때문에 표면에는 미세한 숨구멍이 남아 있어 내부의 물이 이 틈을 통해 서서히 증발하면서 기화열이 발생하고, 그 과정에서 물의 온도가 자연스럽게 낮아지기 때문이다. 시원한 물이 몸에 활력을 주고 열병 예방에도 도움이 된다고 여겨져 페락 지역 전역에서 널리 사용되었다.
통신원은 현지에 거주하는 주재원과 은퇴자들과 함께 이곳을 방문했다. 이색적인 도자기 형태와 지역의 역사적 배경 덕분에 외국인들에게 인기가 높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곳을 둘러보며 흥미로웠던 점은 한편에 도라에몽과 헬로키티 등 일본 애니메이션 캐릭터를 형상화한 도자기들이 전시되어 있었다는 점이다. 이들 역시 모두 전통 라부 사용 제작 기법으로 만들어진 작품이었다. 이에 대해 묻자 라부 사용 전승자인 샤릴(Shahril)은 일본과의 특별한 인연을 소개했다. 그는 “1990년대 아버지가 일본에서 도자기 공법을 배우셨고, 가게 이름인 ‘Win’도 당시 일본에서 아버지를 부르던 이름에서 유래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 이야기를 들으며 라부 사용이 한국의 전통 도자기와도 충분히 새로운 방식의 문화 교류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 표주박 모양의 라부 사용 – 출처: 통신원 촬영 > < 탄화 과정을 거치는 라부 사용 – 출처: ‘뉴 스트레이츠 타임스’ 웹사이트 >
실제로 일본은 라부 사용을 문화예술 교류의 매개체로 활용해 왔다. 2021년 10월 일본 도쿄의 토미오 코야마 갤러리(Tomio Koyama Gallery)에서는 말레이시아 전통 도자기 라부 사용과 다양한 전통 공예품을 소개한 전시 ‘적도의 전승(Lore of Equator)’이 개최되었다. 이 전시는 말레이시아 현대미술가 슈시 술라이만(Shooshie Sulaiman)이 일본의 아우라 현대예술진흥재단(Aura Contemporary Art Foundation)의 지원을 받아 진행한 개인전이었다.
아우라 현대예술진흥재단은 2019년부터 아우라 아시아 아트 프로젝트(Aura Asia Art Project)를 추진하며, 현대화 과정에서 사라져 가는 아시아의 전통 문화예술을 현대미술의 관점에서 재해석하고 보존하는 작업을 이어오고 있다. 슈시 술라이만 역시 2019년부터 ‘전통 공예의 현대적 재해석과 예술 보존’을 주제로 작업해 왔으며, 이 전시에서는 라부 사용 100점과 함께 라부 사용 장인 막 나(Mak Nah)의 제작 과정을 담은 영상 작업을 함께 선보였다. 이 사례는 말레이시아의 고유한 전통 공예가 일본 현대미술계와 연결되어 새로운 예술적 의미와 가치를 창출한 대표적인 국제 문화예술 교류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전통 생활용품이었던 라부 사용이 현대미술의 맥락 속에서 재조명되면서, 지역 문화유산이 국가 간 예술 네트워크를 통해 확장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 라부 사용 연작 – 출처: 아우라 아시아 아트 프로젝트 웹사이트 >
이러한 라부 사용은 한국과 말레이시아 간 문화예술 교류를 모색하는 데에도 좋은 사례가 될 수 있다. 특히 아우라 아시아 아트 프로젝트 사례처럼 라부 사용을 현대미술과 결합해 재해석하고 전시하는 방식은 전통 공예의 명맥을 유지하면서도 현대적 감각을 더한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또한 한국은 옹기, 청자, 백자 등 풍부한 전통 도예 문화를 보유하고 있는 만큼, 양국 장인이 함께 참여하는 전통 공예 보존 및 교류 프로젝트로 발전시킬 가능성도 충분하다.
이러한 교류는 단순히 국가 차원의 문화 소개에 그치지 않고 말레이시아 각 지역의 고유한 공예 문화를 조명한다는 점에서도 의미가 있다. 라부 사용이 쿠알라 캉사르를 대표하는 특산품으로 자리 잡게 된 배경에는 페락 왕실의 후원이 있었다. 라부 사용은 인도네시아 서수마트라(Provinsi Sumatera Barat)의 미낭카바우(Minangkabau) 부족 출신 장인 ‘톡 카룩(Tok Kaluk)’으로부터 전해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당시 제19대 페락 술탄인 압둘 말릭 만수르 샤(Sultan Abdul Malik Mansur Syah, 재위 1806~1825)는 그의 공로를 인정해 캄풍 케팔라 벤당(Kampung Kepala Bendang)의 토지를 하사했고, 이후 라부 사용 제작 기술은 페락 전역으로 확산됐다.
이처럼 지역적인 역사와 특색을 지닌 라부 사용은 동아시아의 도자기 문화와도 흥미로운 비교와 협력 가능성을 제공한다. 실제로 한국 문경도자기박물관에서는 2026년 5월 1일부터 10일까지 한·중·일 도예 교류전인 ‘문경국제도자교류전’이 개최되었다. 이 전시에는 일본 도예가 가네시게 유호(金重有邦), 중국 작가 양칭(楊靑)을 비롯해 한·중·일 3국의 도예가 49명이 참여해 각국의 도자 기술과 미적 전통을 공유했다. 이를 통해 아시아 도자 문화의 상호 발전과 문경 도자의 국제적 위상을 높이는 데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문경국제도자교류전이 동아시아 도자 문화 간 교류의 가능성을 보여주었다면, 라부 사용과 같은 동남아시아 전통 문화를 함께 조명하는 것은 아시아 각 지역의 고유한 문화적 가치를 연결하고 새로운 문화 교류의 지평을 넓히는 계기가 될 수 있다.
사진 출처 및 참고자료
- 통신원 촬영
- 《뉴 스트레이츠 타임스(New Straits Times)》 (2022. 11. 01). #JOM! SHOP: Craft of Kuala Kangsar,
https://www.nst.com.my/lifestyle/jom/2022/11/845726/jom-shop-craft-kuala-kangsar
- 《뉴 스트레이츠 타임스(New Straits Times)》 (2019. 08. 04). Labu sayong maker keeps art alive,
https://www.nst.com.my/news/nation/2019/08/509846/labu-sayong-maker-keeps-art-alive
- 《뉴 스트레이츠 타임스(New Straits Times)》 (2017. 08. 13). Pitcher perfect,
https://www.nst.com.my/lifestyle/sunday-vibes/2017/08/267382/pitcher-perfect
- 《프리 말레이시아 투데이(Free Malaysia Today)》 (2024. 08. 09). Duo keeps skill of making labu sayong in the family,
https://www.freemalaysiatoday.com/category/leisure/2024/08/09/duo-keeps-skill-of-making-labu-sayong-in-the-family
-《불칸포스트(Vulcanpost)》 (2023. 05. 12). This M’sian couple keeps cultural handicrafts alive through their blog-turned-online shop,
https://vulcanpost.com/825869/tangankraf-malaysia-blog-traditional-crafts-artisans-online/
- 《경상투데이》 (2026. 05. 05). 문경도자기박물관 국제도자교류전 개최,
https://www.gyeongsangtoday.com/news/view.php?idx=264522
- 아우라 아시아 아트 프로젝트(Aura Asia Art Porject) 웹사이트,
https://buly.kr/58UqCC4
- 토미오 코야마 갤러리(Tomio Koyama Gallery) 웹사이트,
https://www.tomiokoyamagallery.com/en/exhibitions/shooshie2021/
- 포스 말레이시아(Pos Malaysia) 페이스북 계정(@Pos Malaysia Berhad),
https://www.facebook.com/posmalaysia/photos/131411007074334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