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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 지배를 넘어 다양성의 포용으로: 필리핀 ‘언어의 달’

등록일
2026-08-31
수집기관
한국국제문화교류진흥원
  • 해당 국가

    필리핀

  • 해당 장르

    지식정보

주요내용

부완 응 위카(Buwan ng Wika)'를 알리는 박물관 내 현수막
< '부완 응 위카(Buwan ng Wika)'를 알리는 박물관 내 현수막 - 출처: 통신원 촬영 >
매년 8월이 되면 필리핀 대도시부터 작은 섬마을에 이르기까지, 나라 전체가 거대한 축제 분위기에 휩싸인다. 앙헬레스(Angeles)와 인근 클락(Clark) 역시 평소와는 다른 분위기 속에서 특별한 달을 맞이한다. 8월은 바로 필리핀 국어인 ‘필리피노(Filipino)’어와 전국 각지에 잔존하는 수많은 토착 언어들을 기념하는 국가적 대축제, ‘부완 응 위카(Buwan ng Wika)’가 시작되는 때이다. ‘부완 응 위카’는 우리말로 ‘언어의 달’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 기간이 되면 단순히 언어학적인 학술 행사를 치르는 수준을 넘어서 다양한 문화 활동이 전개된다. 필리핀 사람들은 이 시기를 통해 오랜 식민 지배 역사 속에서 꿋꿋이 살아남은 자국 언어와 문화를 기념한다.


필리핀의 단일 언어 도입은 1935년 마누엘 L. 케손 대통령 재임 시절 시도되어, 1946년 타갈로그어를 기반으로 한 국어가 채택됐다. 같은 해 세르히오 오스메냐 대통령은 타갈로그어 문학 거장 프란시스코 발라그타스의 생일에 맞춰 일주일간의 ‘언어 주간(Linggo ng Wika)’을 제정했다. 초기에는 명칭과 사용을 둘러싼 혼란이 있었으나, 정부는 1959년 공식 명칭을 ‘Pilipino’, 1973년 ‘Filipino’로 변경했다. 또한 1955년 라몬 막사이사이 대통령이 행사 기간을 케손 전 대통령의 생일이 포함된 8월 13일~19일로 옮겼고, 1997년 피델 V. 라모스 대통령이 대통령령 제1041호를 통해 8월 한 달 전체로 격상시키며 오늘날의 장기 문화 축제로 자리 잡았다. 


시간이 흘러 21세기에 접어든 오늘날, ‘부완 응 위카’는 시대 변화에 발맞추어 새로이 진화하고 있다. 과거 행사가 마닐라를 중심으로 ‘타갈로그어 기반인 필리피노어’를 표준어로 보급하고 정착시키는 중앙집권적 통합에 집중했다면, 최근에는 ‘다양성과 포용’을 화두로 다원주의적 가치를 전면에 내세우고 있다. 필리핀은 수천 개의 섬으로 구성되어 있어 세부아노어, 일로카노어, 일롱고어, 와라이어 등 공식 집계된 것만 180여 개가 넘는 언어가 공존하는 초다언어 사회다. 과거에는 이러한 다원성이 국가 통합의 걸림돌로 여겨지기도 했으나, 현재는 소중한 문화 자산으로 여겨지고 있다. 이에 따라 최근의 ‘부완 응 위카’는 소멸 위기에 처한 소수 민족의 언어들을 주류 무대로 끌어올리고 보존하는 상생의 장으로 기능하고 있다. 


마닐라 출신으로 현재 앙헬레스에 13년째 거주 중인 베아 씨는 통신원에게 “마닐라에서 자랄 때 제게 ‘부완 응 위카’는 그저 매년 반복되는 고단한 학교 행사일 뿐이었어요. 모국어인 타갈로그어로 시를 읊고 글을 쓰는 것이 전부였기에 별다른 감흥이나 흥미를 느끼지 못했죠. 하지만 앙헬레스로 이주해 팡팡가(Pampanga) 지역의 고유 언어인 ‘카팜팡간어(Kapampangan)’를 사용하는 사람들과 어울리면서 제 생각은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이 축제가 단순히 표준어를 보급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각 지역의 독자적인 토착 언어와 문화적 자존감을 함께 일으켜 세우는 ‘통합과 포용의 장’이라는 걸 비로소 이해하게 된 거죠.”라고 말하기도 했다. 중앙집권적 표준어 보급을 넘어 각 지역 언어를 존중하는 것은 서로 다른 언어적 배경을 지닌 필리핀 사람들을 하나로 묶어주는 가장 강력한 문화적 끈이 된다. 나아가 소멸 위기에 처한 지역 토착어를 지켜 다음 세대에 온전히 전수하는 일 또한 이 축제와 필리핀 정부가 짊어져야 할 중요한 시대적 과제다. 


필리핀 교육부는 매년 시대적 흐름과 국가적 과제를 반영한 새로운 주제를 발표하며 축제를 시작한다. 이러한 다원적 가치관 위에서 선정된 2026년 ‘부완 응 위카’의 공식 주제는 급격한 디지털 기술 환경을 반영한 ‘필리핀어와 인공지능: 연구 수단이자 정보로 향하는 다리(Wikang Filipino at AI: Kasangkapan sa Pananaliksik at Tulay sa Yaman ng Impormasyon)’이다. 이번 주제는 자국어가 인공지능(AI) 기술 환경 속에서 어떻게 진화하고 살아남을 것인가에 대한 방향성을 제시한다. 인공지능 기술을 도구 삼아 표준어인 필리핀어의 디지털 자산을 체계적으로 구축함은 물론, 각 지역의 소외된 토착 언어들까지 AI 연구 영역으로 포용하겠다는 원대한 목표를 담고 있다. 이러한 모국어 수호와 보존의 열기는 필리핀으로만 국한되지 않고 온라인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2026년 축제 기간을 맞아 주아랍에미리트 필리핀 대사관이 재외 동포들을 대상으로 타갈로그어 스토리 창작 공모전을 개최하는 등, 전 세계 재외공관에서도 해외 거주 필리핀인들의 언어적 정체성을 지키기 위한 다채로운 행사가 이어지고 있다.
올해 축제를 이끄는 곳은 처음으로 한인비지니스협회(KCBA) 산하에서 벗어나 독립한 문화 단체 ‘한카대중문화예술협회(K-CACA, Korean Canadian Arts and Culture Festival Association)’였다. 현장에서 만난 이영희 사무국장은 “기존 한인비지니스협회에서 약 20년간 축제를 진행해 왔지만, 행사 규모와 예산이 50만 불 이상으로 크게 확대되면서 보다 전문적인 문화 단체로 발전시키기 위해 올해 처음으로 독립했다”고 설명했다. 이어 “한인비지니스협회가 모아 둔 축제 기금 5만 불에 개인 후원과 기업 스폰서십, 정부 그랜트를 더해 첫해 예산 10만 불 규모로 본격적인 행사를 준비했다”고 덧붙였다.
부완 응 위카' 관련 전시회
< '부완 응 위카' 관련 전시회 - 출처: 통신원 촬영 >
어떤 면에서 이러한 ‘부완 응 위카’는 한국인에게 다소 생소하게 느껴질 수 있지만, 그 내면에 흐르는 정신적 궤적은 매년 10월 9일 우리가 마주하는 ‘한글날’과 그 의미를 공유한다. 두 나라 모두 식민 지배에 맞서 언어와 정체성을 지키려 투쟁한 역사가 있기 때문이다. 물론 두 나라의 기념 방식에는 차이점도 존재한다. 한국은 세종대왕의 독창적인 문자 창제를 기리며 10월 9일 하루 동안 기념식을 진행하지만, 필리핀은 ‘국어의 아버지’ 마누엘 케손 대통령의 탄생월인 8월 한 달 동안 다언어 환경 속에서 통합과 보존을 도모한다는 차이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유한 언어를 매개로 정체성을 확인하고 자부심을 고취하려는 열망은 두 나라가 완벽하게 닮아 있다. 결국 ‘한글날’과 ‘부완 응 위카’는 단순한 기념일을 넘어, 빼앗겼던 주권을 회복하고 민족의 정체성을 바로 세운 숭고한 역사적 자부심의 표상이다. 언어를 지키는 것은 결국 그 언어 속에 담긴 민족의 역사와 미래의 꿈을 지키는 일이다. 8월 한 달 동안 필리핀 전역을 뜨겁게 달구는 이 언어의 향연은, 우리에게도 곧 다가올 한글날을 어떤 마음가짐으로 맞이해야 하는지, 그리고 일상의 말과 글 속에 담긴 민족의 정체성과 역사적 자부심을 되돌아보게 만드는 소중한 문화적 거울인 셈이다.


이러한 가치를 직접 확인하기 위해 찾아간 ‘부완 응 위카’ 전시회장 풍경은 뜻밖에 호젓했다. 한 달에 걸친 ‘언어의 달’이라 그런지 전시 공간은 소수 인원만 찾고 있었다. 전시관의 묵직한 고요 속에서 느껴진 언어를 향한 정적이고 깊은 탐구는, 한국 문화와 한글이 필리핀 현지에 다가가는 방식에 대해서도 깊은 시사점을 던진다. 그동안 필리핀 내 케이 컬처와 한글 보급이 대중적인 열기와 소비 중심의 화려함에 집중했다면, ‘부완 응 위카’가 보여준 토착어 보존의 현장은 우리에게 ‘깊이 있는 진정성 중심의 교류’가 필요함을 일깨워준다.


우선 이는 필리핀 내 한글 교육 방향에 중요한 시사점을 제공한다. 현재 세종학당 등을 중심으로 한국어 학습 수요가 꾸준히 증가하고 있으나, 단순한 언어 지식 전달에 그쳐서는 현지인들의 마음 깊은 곳에 닿기 어렵다. 세종대왕이 훈민정음을 창제하며 담았던 애민 정신과 식민 지배 속에서 모국어를 지켜낸 한국의 역사는, 필리핀이 ‘부완 응 위카’를 통해 지켜내고자 하는 자국 언어 수호의 정신과 완벽히 궤를 같이한다. 따라서 한글 교육 현장에서 ‘부완 응 위카’ 기간을 활용해 양국의 언어 수호 역사를 공유하고, 카팜팡간어나 세부아노어 등 현지 학생들의 뿌리가 되는 토착어의 가치를 함께 존중하는 교육 프로그램을 기획할 필요가 있다. 일방적인 언어 보급이 아닌, 현지인의 언어적 정체성에 경의를 표하는 상호 문화적 접근이야말로 한글 교육이 필리핀 사회에 깊고 따뜻하게 뿌리내리게 하는 강력한 힘이 될 것이다.


나아가 한국 문화 산업(케이 콘텐츠)의 진출 전략 측면에서도 시사하는 바가 있다. 그동안 한국 드라마, 케이팝 등 한국 콘텐츠는 수도 마닐라 중심의 표준 타갈로그어나 영어를 통한 대중적 확산에 주력해 왔다. 그러나 지역 토착 언어를 조용히 지켜가려는 필리핀 내부의 다원주의적 흐름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2026년 주제처럼 필리핀이 인공지능 기술을 활용해 소멸 위기의 지역 언어를 포용하듯, 한국 문화 산업 역시 인공지능 번역·음성 기술을 적극 접목해 카팜팡간어, 일로카노어 등 지역어 자막이나 더빙을 제공하는 등 ‘진정성 있는 현지화’를 시도할 필요가 있다. 필리핀의 소수 지역 문화까지 세심하게 배려하는 이러한 접근은 “한국 문화가 우리의 다원적 정체성을 존중한다”는 깊은 신뢰를 형성할 수 있다. 결국 한국과 필리핀 양국이 서로의 언어와 문화적 뿌리를 진심으로 존중하고 다가설 때, 두 나라는 일회성 문화 소비를 넘어 지속 가능한 깊은 문화적 관계로 발전할 수 있을 것이다.
사진 출처 및 참고자료  
- 통신원 촬영   
- ≪필리피노팟101(FilipinoPod101)≫ (2020. 07. 27). Buwan ng Wika: Celebrating Filipino Language Month, 
https://www.filipinopod101.com/blog/2020/07/27/buwan-ng-wika-celebrating-filipino-language-month/ 
- ≪더 필리핀 스타(The Philippine Star)≫ (2024. 08. 25). Facts, history explained: August is Buwan ng Wika in the Philippines, 
https://www.philstar.com/lifestyle/arts-and-culture/2024/08/25/2377351/facts-history-explained-august-buwan-ng-wika-philippines 
- ≪필리핀 인포메이션 에이전시(Philippine Information Agency)≫ (2026. 08. 03). KWF, binigyang-diin ang etikal na paggamit ng AI sa paglulunsad ng Buwan ng Wika, 
https://pia.gov.ph/news/kwf-binigyang-diin-ang-etikal-na-paggamit-ng-ai-sa-paglulunsad-ng-buwan-ng-wika/ 
- ≪발리타(Balita)≫ (2026. 08. 08). Public school na pinutakti dahil sa AI poster contest, nagsalita na!, 
https://balita.mb.com.ph/2026/08/08/public-school-na-pinutakti-dahil-sa-ai-poster-contest-nagsalita-na/ 
- ≪래플러(Rappler)≫ (2026. 08. 16). Musika at wikang Filipino: Mga piling awit para sa Buwan ng Wika,
https://www.rappler.com/people/artists/musika-wikang-filipino-awit-buwan-ng-wika/